양주별산대놀이
- 최초 등록일
- 2003.12.11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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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양주 별산대놀이.. 직접가서 보고 열심히 조사했습니다^^
목차
【“양주별산대놀이”의 정의】
【양주별산대놀이의 역사와 배경】
【양주별산대놀이의 특징과 의의】
【양주별산대놀이의 모든 춤 소개】
본문내용
【양주별산대놀이의 역사와 배경】
양주 별산대(楊洲別山臺)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본산대(本山臺)라고하는 녹번(碌磻), 아현(阿峴)등지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연희자들은 쌀, 포(布)등을 지급받았다. 그들은 보통 편놈(便人)들로서, 인조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각기 분산되어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 이 단체(契)를 모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결과 녹번리(碌磻里)산대, 애 오개(阿 峴)산대, 노량진(鷺梁津)산대, 퇴계원(退溪院)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생긴 것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약 200년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 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관아의 하리패인 아전(衙前)들이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 떠서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심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으로 양주 최초의 탈 제작자 이다. 양주의 옛 읍은 교통의 요지로서 주막이 즐비했고, 또 양주목사(楊洲牧使)가 주재 (駐在) 하던 곳으로 한강이북에서는 가장 큰 고을이었다.
참고 자료
*자료출처 http://www.sandae.com 양주별산대놀이 공식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