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임오화변'을 바라보는 여러 견해 (사도세자와 영조)
- 최초 등록일
- 2022.04.16
- 최종 저작일
-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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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오화변'을 바라보는 여러 견해 (사도세자와 영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비교분석
1. 논문 요약 및 분석
1) 김영민,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애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정치적 의의”, 2008
2) 이승복, “<한중록> 임오화변 편의 서술양상과 의미”, 2015
3) 이병욱,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2004
4) 정경진, “正祖의 『義理論』에 대하여: 思悼世子 문제를 중심으로”, 2003
5)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 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 2002
2. 논문 비교
3. 나의 견해
Ⅳ. 결 론
V.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사도세자(思悼世子)는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의 두 번째 왕자이자, 22대 왕인 정조의 아버지이다. 실제 이름은 이 선(李愃)이며, ‘사도세자’는 사후 영조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생각 사(思)에 슬퍼할 도(悼)를 써서 세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사도세자라고 하면 아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뒤주’일 것이다. ‘임오화변(壬午禍變)’은 영조가 대리청정 중이었던 왕세자를 폐위하고 뒤주에 갇히게 하여 죽인 사건이다.
역사계에서는 이 죽음을 둘러싸고, 과연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많은 연구가 나왔다. 우선,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제시되고 있는데, 하나는 사도세자가 노론과 소론의 당쟁에 휘말린 정치의 희생양이라고 보는 견해와 하나는 사도세자의 광증으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두 견해 모두 일단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아예 근거가 없다고 보기는 힘드나, 아직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 현재 역사학계의 실정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현재 역사학계에서 '임오화변', 즉,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게 된 다양한 견해에 대해서 분석 및 비교하고, 이에 덧붙여 나의 견해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Ⅱ. 비교분석
1. 논문 요약 및 분석
첫 번째 논문은 2008년에 저술된 김영민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애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정치적 의의”이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해서 당쟁이 아닌 정신질환으로 인하여 왕위계승이 어려워졌고, 이로 인해 ‘임오화변’ 일어났다고 보았다. 저자는 세자시강원과 춘방원의 상황에 대해서 분석하며, 세자가 소론에게 보호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고 본 기존 연구의 견해에 대해 비판했다.
사도세자는 일찍이 영조의 관심 속에서 교육과 유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관료들은 시강원직을 기피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패초에 응하지 않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참고 자료
김영민(Kim Young-Min).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애와 ‘임오화변(壬午禍變)’의 정치적 의의." 역사문화논총(2008)
이승복(Lee Seung Bok). "<한중록> 임오화변편의 서술양상과 의미." 문학치료연구 34.- (2015)
김용숙, <한중록>연구, 한국연구원, 1983, 198~215면
이병욱 (Lee Byunguk),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에 대한 분석적(分析的) 고찰(考察), (2004)
鄭景姬. "正祖의 『義理論』에 대하여." 韓國學報 29.1 (2003): 22-56. 思悼世子 문제를 중심으로
김성윤. "영조대 중반의 정국과 '임오화변' - 임오화변(사도세자 폐사사건)의 발생원인에 대한 재검토를 중심으로 -." 역사와 경계 43.-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