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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초기 문인 네트워크와 풍문 탄핵"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I. 머리말
II. 조선 초기 왕권과 신권, 언론의 역학 관계
1) 태조부터 성종 즉위 이전의 역학 관계
2) 성종 즉위 이후의 역학 관계
III. 사림의 네트워크 구축과 언론의 풍문 탄핵
1) 문인 네트워크 형성과 언론
2)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 언론의 풍문탄핵
IV. 맺음말
본문내용
유학은 농본주의 사회에서 발현했다. 유학이 등장하는 경제·사회적 상황에서, 주로 관심을 가졌던 계층은 지주 계층이다. 농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경제적 우월성을 가진 이들은 곧 공적(公的) 체제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초기 유학은 춘추 전국시대라는 사회적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주(周)대로 대표되는 이상 국가를 제시하였다. 결국 농본 사회에서 유학은 기득권, 즉 지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학문이었다. 이는 후대에 신권 강화를 위한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따라서 유교 왕정은 요·순임금 같은 상고시대 성왕의 정치를 인정(仁政)과 덕치의 표상으로 삼았으며, 신료들은 유교 경전에 산재한 삼황오제의 치적을 정리해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요구하였다.
이 상황에서 왕은 왕도정치 실현을 위해 ‘공(公)’을 실천해야 했다. 왕도정치에 필요한 것은 언로(言路), 즉 모든 인원이 왕에게 간언(諫言)할 수 있는 길의 확대였다. 언로를 통한 간언은 공론(公論)의 형식을 지녔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천리인욕론(天理人慾論)에 따라, 유학자들은 천리를 파악하는 주체가 자신들임을 강조하였다(동북아역사재단, 2015). 그렇게 유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공적인 영역으로 편입하였으며, 유학은 신권의 논리를 대변하는 학문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은 왕도정치를 표방했으나, 초기 정치를 보면 왕도정치가 이루어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태종과 세조는 정권 장악에 이바지한 공신을 제외한 신권을 철저히 탄압하였다. 성종 즉위 후 이 상황이 바뀌는데, 그 배경은 사림의 관직 진출에 있다. 현행 역사 교과서도 사림의 정계 진출을 ‘왕권을 제약할 정도로 커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로 설명한다. 하지만, 성종 즉위 초기 공신(훈구) 세력과 김종직 문파의 일부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것이 식별되는 점을 고려하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였다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 이와 더불어 성종 즉위 이전에도 언론이 존재했음을 감안하면, 언론이 제도적으로는 존재하였으나 성종 대 그 기능이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정치세력으로서 사림의 등장 배경과 특성을 비롯한 종합적인 맥락을 파악해야 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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