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문화와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 최초 등록일
- 2021.09.23
- 최종 저작일
-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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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백제의 문화와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1. 발견경위
2. 불비상 명칭의 의미
Ⅲ. 조상과 명문의 내용 해석
1. 조상의 내용
2. 명문내용 및 해석
3. 불사와 불상의 조성시기에 대한 논란
Ⅳ.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에 담긴 정신과 의미
1.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운동
2.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등수여를 통한 백제유민정책
3. 백제의 불교의 흐름과 불상에 담긴 의미
Ⅴ. 결 론
Ⅵ.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백제는 4세기 후반 불교를 처음 접한 뒤 민중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려서 1세기가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사원을 건립하였다. 백제의 경우 현존하는 불상은 모두 사비시대 이후의 것이고 웅진시대의 불상은 지금까지 한 점도 발견되지 않아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충남 연기 지방에서 발견된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은 호류지 삼존상의 계보추정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여기서 호류지 삼존상은 일본 나라의 호류지 금장의 석가삼존상으로 아스카조각을 주도했던 도리 양식의 대표작이다. 통일신라 초기인 673년에 백제 유민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전통이었던 백제 조각양식으로써 조성한 귀중한 예로, 따라서 전반적인 양식은 7세기 초로 편년해도 좋을 정도로 고식을 띠고 있다. 비록 시대는 늦지만 구양식을 답습한 것이므로 호류지 삼존상의 계보추정에 귀중한 단서를 제공한다. 재료 역시 돌이지만 높이 43cm의 소형이어서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소형 금동불처럼 미술양식 전파의 수단이 될 수 있다.
Ⅱ. 계유명아미타삼존불비상
1. 발견경위
1960년 한 대학생이 자기 고향인 충청도 연기에 있는 비암사에 명문이 새겨진 돌이 있다는 보고서를 숙제로 제출하였다. 그 학생을 지도하던 황수영 교수는 그 돌이 범상치 않음을 확인하고 1960년 9월10일, 이 절에서 사방에 불보살이 새겨진 불비상(佛碑像) 3개를 확인한 후 이를 국보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회에 보고하여 국보로 지정케 한 다음 학계에 소개하였다. 그런데 이중 두 개의 불비상에는 연대가 기록된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그 조성 연대와 조성 발원자 및 불보상의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후 충남 연기지방에서는 아미타 불비상 말고도 불상 6기가 잇달아 발견되었다. 특히 아미타불비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백제가 멸망한 이후로 여겨지는데도 달솔이란 백제 관등이 새겨져 있어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나라가 망하고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백제 유민의 숨결을 묵묵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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