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로 유학을 떠난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일찍이 중국 당나라로 유학하여 과거에 급제한 뒤 당나라 관리가 된 인물 바로 최치원이다. 최치원은 신라 골품제에서 6두품(六頭品)으로 신라의 유교를 대표할 만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최씨 가문출신이다. 특히, 최씨 가문 중에서도 이른바 ‘신라 말기 3최(崔)’의 한 사람으로서, 새로 성장하는 6두품출신의 지식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계(世系)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버지 견일은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 의 창건에 관계하였다.
최치원이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아버지 견일은 그에게 10년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뒷날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던 점과 아울러 신흥가문출신의 기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禮部侍郎)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 조정은 신라 출신들을 하급관리나 변방 관리로 보냈기 떄문에 중국 회남지역 절도사로 파견되게 된다.
때마침 황소의 난* 으로 당나라는 민심이 어지러워 지게 되었으며 당나라 왕 희종은 고변을 불러 반란군 토벌을 명했다.
고변은 최치원에게 황소에게 보낼 경고문 격황소서 작성을 지시하게 된다.
대개 옳고 바른 길을 정도(正道)라 하고 위험할 때 임기웅변으로 모면하는 것을 권도(權道)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정도에 따라 이치에 순응해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권도를 함부로 행하다 이치를 거슬러 패망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격황소서 내의 명문장이기도 한다. 최치원은 이 글에서 요순 시대의 묘와 호로부터 안록산에 이르기까지 반란을 꾀한 무리를 하나하나 열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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