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으며 북한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이후 8월 중순에는 북한군이 마산-왜관-포항선까지 남하하여 낙동강 방어선 전투가 벌어졌고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만 뚫으면 항복을 받아내어 무력통일을 할 수 있을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은 다시 고립되었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했다.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과 북한군의 남하로 유엔군은 총퇴각하였다.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중에는 수많은 포로가 붙잡혔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궁지에 몰렸고 육해공이 합세한 공세에 퇴로를 잃고 곳곳에서는 투항자가 속출했다. 북한군은 이미 1950년 8월부터 영양실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고 산악지형의 전투를 치를 만한 체력을 상실해 사기가 땅에 떨어져있었다. 10월 한 달 동안 6만 2천여 명의 포로가 양산됐으며 12월 말에는 13만 5천 명을 넘어섰다. 당시 인민군 포로였던 송관호는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고향을 눈앞에 두고 미군에게 포로가 됐다. 비행장의 큰 창고에 들어가니 어림잡아 수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붙잡혀 와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1950년 7월 14일 이승만이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였다. 이전까지 한국군 관할의 부산영도포로수용소와 미군 관할의 부산 동래 거제리 미8군 포로 수용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작전권을 이양하면서 부산영도포로수용소가 폐쇄되고 미8군 포로수용소로 통합됐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많은 인민군 포로가 발생해 유엔군은 부산 거제리와 경북 영천 등에 있던 포로들을 옮기기 위해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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