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은 담묵(淡墨)의 난엽에 화심(花心)만 농묵으로 강조한 매우 간결한 구도이다. 이 외의 다른 풀이나 돌, 대지를 그리지도 않았고, 구도상 오른쪽의 <산심일장란>에서 보이는 ‘봉의 눈’이나 ‘메뚜기 배’와도 같은 형상도 없다. 즉 일반적인 사군자에서의 난초도와는 다른 풍격의 그림인 것이다. 사군자화는 산수화나 인물화에 비하여 비교적 간단하고 서예의 기법을 적용시켜 그릴 수 있다는 점에서 여가로 그림을 그리는 선비와 문인들에게는 가장 적절한 소재였다. 또한 서예의 필력 자체가 쓴 사람의 인품을 반영한다는 원리의 연장으로 북송 때부터 사군자화는 화가들의 인품 또는 성격 전체를 반영한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문인들 사이에 더욱 환영받는 소재가 되었다.
그림의 형태나 기법이 간단할수록 그 소재 자체에 부여하는 상징적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남송 말기부터 원대(元代) 초기에는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나라를 잃고도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은둔 생활을 한 문인들 사이에 무언의 저항 수단으로도 그려졌다. 유명한 예로는 원대 초기의 사대부 정사초(鄭思肖)의 난초이다. 흙 없이 난초 포기만을 그려 몽고족에게 국토를 빼앗긴 설움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완당(추사의 연경 시절 후의 호)은이 난초그림에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는 대만족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그 희열을 화제로서 제시를 통해 남겼다.
“난초를 안 그린 지 스무 해인데/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
문 닫고서 찾고 찾고 또 찾은 곳/ 이게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네.“
완당 스스로 자화자찬의 화제를 쓰고, 여백에도 다른 화제를 쓴다.
“초서와 예서의 기자(奇字)의 법의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제하다.”
유홍준은 [완당평전]에서, 이러한 완당의 넘치는 희열을 표현하곤 했던 것이 그의 많은 적들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완당의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이해하거나 존경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오만한 것으로 보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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