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 론
19세기 말, 조선은 시대적 과제 앞에 서 있었다. 반봉건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두고 많은 파로 나뉘었다.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그중에서도 온건과 급진으로 나뉘는 등 사람들은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개항을 계기로 외압이 가증되었으며, 대내적으로 전통사회의 모순이 심화되고 있었던 역사의 격변기였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들의 선진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조국의 운명 앞에 가장 먼저 답한 개화파, 그중에서도 김옥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김옥균은 한말 초기 개화파의 지도자로서 1884년에 발생한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이다. 시대의 풍운아, 혁명가, 애국적 개화사상가, 친일 매국노 등 김옥균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관점에 따라 평가는 천차만별이다. 과연 그의 행보는 어땠고, 왜 이런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지, 남과 북이 내리는 그에 대한 평가는 어떠한지 등을 알아보고자 한다.
Ⅱ. 김옥균의 생애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에서 김병태와 송 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856년 오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들어가 서울에서 자랐다. 양부 김병기는 강원도 강릉부사를 거쳐 나중에는 형조참의의 지위까지 올랐던 명문의 사람이며, 이에 김옥균은 상류사회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인근 주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11세 때는 강릉의 율곡 이이를 모셨던 서원에서 그의 학풍을 배웠다. 1866년, 그가 16세일 때 양부를 따라 서울로 돌아왔고 당시에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병인양요, 청의 아편전쟁 패배 등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내세우면서 서구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였고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박규수에 의해 자주적 개국론이 주장되었으며 민중들 사이에서는 동학이 전파되어 사상적으로도 혼란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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