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국은 완전히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들은 주로 한인 이주민이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 만주나 연해주 등지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되었다. 상해는 한국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독립운동은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그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과정의 중심에 예관 신규식(睨觀 申圭植, 1880~1922)이 있다. 신규식은 충청도 문의군 동면 인차리(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총명했던 그는 신채호(申采浩)·신백우(申伯雨)과 ‘산동삼재(山東三才)’라고 일컬어졌다. 신규식은 향리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6년에는 한양조씨와 결혼하였는데,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곧 상경하였고,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여 중국어, 지리 등을 학습하였다. 군사력의 중요성을 일찍이 인지하고 있었던 그는 1900년에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임관되어 참위(參尉), 부위(副尉)에까지 진급하였다. 신규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거의(擧義)하였고, 이 일이 좌절되자 음독자살을 시도하였다. 이때 한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겨보는 눈이 되자 스스로를 ‘예관’이라 칭하였다. 신규식은 군인으로서 항일투쟁을 전개함과 동시에 애국계몽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동안 독립협회,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등에서 활동하였고,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운동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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