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운 최제우 선생의 생애
- 최초 등록일
- 2021.02.16
- 최종 저작일
- 20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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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수운 최제우 선생의 생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탄생과 어린 시절
2. 구도생활
3. 하날님으로부터 강령을 받음
4. 동학으로 포덕을 함
5. 음해와 도피생활
6. 접주제의 실시
7. 도통(道統)을 전해줌
8. 실패한 예언
9. 정부의 조사
10. 좌도난정으로 참형에 처해짐
본문내용
1824년(갑신) 10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月城郡) 현곡면(現谷面) 가정리(柯亭里)에서 최옥(崔鋈)과 곡산(谷山)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귀여운 아이, 혹은 복스럽게 생겼다는 뜻의 복술(福述)이었고 본명은 제선(濟宣)이며 자는 도언(道彦)이었다. 제우는 1859년 고친 이름이며, 호가 수운 또는 수운제이다.
그의 아버지 최옥은 자성(子成)이고 호는 근암(近庵)인데 임오생(1762년 3월 23일)년에 태어나 유학에 능했으나 벼슬을 못한 채 향반(鄕班)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최옥은 그의 부친이 만들어 준 학사를 용담서사(龍潭書舍)라 하고 제자들을 가르쳐 큰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정환경이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부인과의 관계에서 그의 근심은 매우 깊었다. 1778년 오천(烏川) 정씨(鄭氏)를 첫 부인으로 맞아들여 아들 하나를 얻었으나 죽고 딸만 하나 두었으나 36세경에 부인상을 당하였다. 두 번째에 달성(達城) 서씨(徐氏)와 정사년(1797년) 재혼하게 된다. 이 분 역시 50세 되던 1811년 10월 4일 세상을 뜨고 말았으니 딸 둘에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기게 되었다. 다시 장가들기를 단념하고 51세경에 동생 규(珪)의 아들 제환(濟寏= 1789년생)을 양자로 들여 살림살이 일체를 맡기고 선친이 지어준 용담서사(龍潭書舍)에 들어가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해 영남학파의 계보를 이루었으며 영남 일원에서는 명성이 제법 알려져 그의 제자들이 근암집(近菴集)이라는 문집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다가 제자의 소개로 이웃 금척리에 살고 있던 과부인 곡산(谷山) 한씨(韓氏)를 아내로 맞았다.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부모가 수운선생을 잉태하게 된 과정을 잘 묘사하고 있다. 기궁한 팔자로 인해 자식이 없어 조상님 전에 면목이 없기에 팔도의 불전에 시주하고 지성으로 산제해서 하날님께 백배축원을 했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소춘,「대신사 수양녀인 팔십 노인과의 문답
『신인간』통권 16호, 1927년 9월호, 16-17쪽
黃玹, 『梧下記聞』
『고종 실록』 1권, 1책 124면.
이능화 저 / 이종은 역, 『조선도교사』(서울: 보성문화사, 1992), p.325.
일성록』, 高宗 元年 甲子 二月 二十九日 庚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