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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복 이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대응"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광복 이후 친일파 청산에 대한 정치세력의 인식
3. 반민특위의 구성과 활동 내용
4. 반민특위의 좌절 원인
5. 결론
본문내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반식민지를 경험한 국가에서는 과거사 청산이 역사적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다. 1945년 광복 이후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뿌리 깊게 남아있는 일제의 잔재와 친일파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조속히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과감한 개혁을 단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3년간의 미군정은 척결대상인 반민족행위자들을 그대로 온존시켰다. 그래서 그들은 권력집단으로 변신하였고, 또한 반공애국자·건국공로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반민특위가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헌법에 근거하여 설치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반민특위에 관한 연구는 1970년대 이전인 1950~1960년대에는 간단한 소개조차 나오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까지 반민특위에 관한 이렇다 할 언급이 되지 않은 것은 당시 남한 사회의 경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다 한일회담을 계기로 친일파 연구가 시작되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70년대에 한국 현대사에서 반민특위 문제에 중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198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의 붕괴와 광주민주화운동·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과 함께 반민특위 연구가 급증한 시기로, 이 시기 반민특위에 대한 전반적 사실이 복원되었고, 친일파 문제를 미군정의 정책과 연결시키는 등 반민특위에 대한 인식도 급성장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0년대 중반 이후 반민특위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이는 1948~50년의 한국사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반민특위 관련 자료가 발굴된 것이 기반이 되었다. 이 당시 연구로 단정세력으로 인식된 제헌국회 내에서 어떻게 반민법이 제정되었고 반민특위가 조직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90년대의 연구기반 확장 속에서 반민특위 구성원의 성격·반민특위 방해 공작의 사례·친일파 비호 세력의 실체·반민특위 도조사부의 조직과 활동 등 반민특위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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