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후삼국 통일(태조의 통일정책과 통일의 의의)』
- 최초 등록일
- 2020.05.05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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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의 후삼국 통일(태조의 통일정책과 통일의 의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대내정책.
① 대호족정책(對豪族政策).
② 대민정책(對民政策)
3. 대외정책
① 외교정책
② 군사정책
4. 태조의 정치이념. - 고려의 고구려계승 이념.
5. 고려 통일의 의의.
6.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 했던 9C~10C는 신라에 의해 통일 되었던 정국이 다시 세 개의 후삼국으로 분열 되었던 시기였으며, 다시금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서 40여년 만에 2번째 통일 왕조를 세우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시기 초반에는 후삼국의 분열이라는 어지러운 정국 이었으며,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함이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함 속에서도 전 왕조였던 통일신라에서 고려로의 통일된 왕조교체가 가능하였다는 점은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과 또한 궁예의 정책과는 다른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따라서 본 발제문에서는 고려의 후삼국통일 이라는 큰 주제아래 통일정책과 의의 라는 부제를 넣어서 통일을 하게 되는 전투과정에 비중을 두기 보다는, 크게 태조의 대 내.외 정책과, 정치이념, 그리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의 의의를 다루도록 하겠다.
2. 대내정책.
① 대호족정책(對豪族政策).
태조의 대호족정책에는 크게 화합, 견제 두 가지로 분류 된다. 먼저 태조의 화합정책을 살펴보면, 태조의 즉위 초였던 918년 당시 신라정부는 통제력을 잃은 상태라 지방세력들이 스스로 군사를 모아 자기 고을을 지키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시 후백제나 고려나 호족을 자신의 편으로 얼마나 끌어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태조는 우선 즉위 하자마자 이들을 화합하며, 호족포섭을 위해 회유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앞의 사료에서 보듯이 사신을 보내 후한 선물을 보내고 말을 낮추어 회유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으며, 즉위 후 정사를 보면서 신하들에게 자신이 왕위에 나간것은 여러 호족들의 추대 때문이라 하고 군신 모두가 친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즐거움을 함께하자면서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청주 출신으로서 억울하게 피해를 본 사람들을 석방케 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즉위 후 호족세력에게 화합을 강조하고 회유하려 했던 이유는 그가 태봉의 호족(豪族) 중 유력한 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의 왕이 되었다지만, 그를 시기하고 의심하여 협조하지 않은 세력과 그를 질시하고 적대하여 정권을 빼앗으려는 세력이 많아서 전혀 안심할 수 없었던 상태였다.
참고 자료
고려사.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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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한국사신론, 일조각,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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