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중국(명나라), 일본(왜), 여진과의 관계를 통해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에 대해 알아보며, 이러한 외교 관계를 통해 조선이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알아본다. 조선의 정치와 사회 과목 레포트로 제출 되었으며 초선초기 대외관계 시험공부에도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대명(對明)관계
3. 대일관계
4. 대 여진관계
5.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조선(朝鮮)은 국초부터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한 외교정책을 세웠다. 이러한 외교정책은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다. 최승희, 『조선 초기 정치문화의 이해』, 지식산업사, 2005, p. 21.
조선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으로 표현된다. 조선의 핵심 외교 대상은 당연히 원(元)을 물리치고 생긴 명(明)과의 대외관계였다. 명과의 관계가 원만해야만, 국가의 안위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남쪽의 일본과 북쪽의 여진에 대한 정책도 신경 써야 했다. 일본과의 관계는, 과거 고려 때부터 지속된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을 받아왔다. 결국 왜구 지속적인 침략은 조선에게는 해결해야할 중요한 일들 중 하나였다. 여진(女眞)과의 관계역시 신경 써야 할 문제였다. 번번이 조선으로 침입하는 여진족으로 인해 조선정부는 김종서와 최윤덕으로 하여금 조선의 북방 경계지역의 방비를 강화하였고, 이곳에 4군 6진을 설치하였다.
2. 대명(對明)관계
태조(太祖) 이성계는 조선 건국 전, 우왕 14년(1388년) 요동정벌에 나서라는 최영(崔瑩)의 명령을 받았으나 반대하였다. 이때 그는, 이소역대를(以小逆大) 이소역대(以小逆大): 이성계의 4불가론중의 하나.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라는 주장
주장하였다. 그러나 조선 건국 후, 태조는 정도전(鄭道傳)등을 앞세워 요동정벌을 추진하는데, 이는 그가 명에 대해 사대적인 입장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명이 조선을 지속적으로 압박해왔고, 결과적으로 조선을 침공해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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