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 프랑스에서의 진보와 혁명을 중심으로 -
- 최초 등록일
- 2019.12.28
- 최종 저작일
- 20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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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 프랑스에서의 진보와 혁명을 중심으로 -"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영국과의 대비 및 대비의 근원
2. 상업적인 농업에 대한 귀족의 반응
3. 계급 관계와 절대 왕정
4. 귀족의 공격과 절대 체제의 붕괴
5. 대혁명 시기의 농민들과 급진주의의 관계
6. 대혁명에 저항했던 농민 : 방데의 농민
7. 혁명적 공포 정치의 사회적 결과
8.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영국과의 대비 및 대비의 근원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서 중요한 요소는 지주 젠트리와 귀족의 왕권으로부터의 독립,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상공업 계급의 성장, 이에 발맞춘 젠트리와 귀족의 상업적 농업 경영 방식의 체택, 그리고 농민 문제의 소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사회는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프랑스 귀족들은 한낱 국왕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후반부터 바뀌기 시작했지만 궁극적인 결과로서 귀족의 몰락이 나타났다.
18세기 영국의 귀족들과 비교해볼 때 프랑스의 귀족들은 대부분 그들 영지의 농민들로부터 현금이나 현물에 의한 부과조로 살고 있었다. 영주들은 직영지의 경작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그 규모는 작은 편이었다. 영지는 영주들이 수확에 대한 보상으로서 그 일부분을 떼어내어 농부들이 소유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에 줄어든 것이다. 영주들은 가능한 그들의 토지를 한데 묶어 빌려주었는데, 그것은 많은 경우 영주들이 미구에 그것을 되돌려받을 수 있는 좋은 관계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영주들은 종종 싸움터로 멀리까지 떠나야 하 기 때문에 직접 소농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귀족들은 일찍부터 법률에 의해 지위를 보장받고 있었다. 뚜렷하게 규정된 법적 지위와 농민 부과 조에의 의존이라는 특성에 의해 영국의 젠트리와 구별된다. 또 다른 생활의 방도가 제공된 도시의 성장에 의해 증가된 농촌 지역의 노동 수요에 편승함으로써 농민은 인신적인 예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혁명의 시기까지 농민들도 실질적인 토지 소유권을 향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참고 자료
베링턴 무어, 진덕규 옮김,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1999년, 도서출판 까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