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 의병
- 최초 등록일
- 2019.08.30
- 최종 저작일
- 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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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돌석의 출생부터 의병활동, 죽음까지 이르는 생애가 잘 정리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서적에서 잘 참고하여 작성된 자료이니,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한국독립운동사와 신돌석의 생애와 비교해놓은 표도 있습니다.
목차
1. 신돌석
1) 신돌석 약력과 성장배경
2) 의병활동의 배경
4) 낙목이 가로놓인 조국을 탄식, 영릉 의병장으로 의거
5) 민중의 의병전쟁 참여의 기폭제
6) 의병을 소부대 단위로 편성, 유격전 수행
7) 31세의 나이에 쓰러지다
본문내용
1) 신돌석 약력과 성장배경
신돌석(1878.11.3.∼1908.11.18)은 본관은 평산, 자는 순경이고 호는 장산, 본명은 태호이다. 이명은 돌석·태홍· 태을·대호이며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 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
에서 출생하여 퇴계의 방계인 육이당 이중립 에게 학문을 배웠다.
신돌석이 태어난 곳은 이필제 난 1871년(고종 8) 3월 10일 동학교도 이필제(李弼濟:1824~1871)가 영해에서 일으킨 봉기, 삼남민란 이후 최대의 반(反)봉건 농민운동이었다.
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이곳은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이 드높은 고장이었기 때문에 신돌석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신돌석의 가문은 고려시대에는 개국공신인 신숭겸의 후예로서 입신출세하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중인신분으로 하락하여 대대로 영해부의 아전 노릇을 하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신돌석 대에 와서는 평민 신분으로까지 전락하였다고 한다. 여기에 더하여 선생이 태어난 시기는 개항 직후 외세의 침탈이 고조되던 시기였고, 또 성장하던 시기는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혈안이 되어 가던 시기였으므로 반봉건 의식과 함께 반일 민족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반일 민족의식은 성장과정에서의 교육과 교류관계를 통하여 더욱 증폭되어 갔다. 평민 신분이었지만 부친의 지도와 격려 아래 일찍이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혔다. 그리하여 15세가 되자 신돌석은 정세를 파악하고, 뜻을 펴기 위해 전국 각지로 지사, 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친분을 쌓았다. 그러던 중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그를 빌미로 한 일제의 침략 야욕을 목격하게 되면서 자신의 반일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다졌다.
참고 자료
채순희,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http://www.mpva.go.kr,
김대호. (2014), “[동해안 항일운동의 중심 영덕] <중>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