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조사
- 최초 등록일
- 2019.07.12
- 최종 저작일
- 2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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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창덕궁에 대하여
3. 맺음말
4. 참고문헌
본문내용
머리말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화정’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드라마의 내용 중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소실된 창덕궁을 중건하는 장면이 나왔다. 창덕궁을 평소에 많이 들어는 봤지만 세세하게 알아본 적도 없고 직접 본적도 없었다. 주말동안 서울에 갈 기회가 생겨서 나는 창덕궁을 처음으로 가보자 하고 창덕궁이 있는 종로로 향했다.
창덕궁에 대하여
창덕궁 소개
창덕이란 ‘덕의 근본을 밝혀 창성하게 하라’는 뜻이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5년) 조선왕조의 이궁으로 지은 궁궐이다. 경복궁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이웃한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이라 불렀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정궁인 일제 강점기에 많은 부분이 의도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그린 《동궐도》와 1900년에 그려진《동궐도형》을 참조하여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창덕궁의 역사
1392년 태조 이성계가 개경에 있던 고려 궁궐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한 뒤, 재위 3년(1394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고 이듬해에 조선의 법궁으로 경복궁을 세웠다. 그러나 건국 직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와 공신 세력 사이의 갈등으로 왕자의 난이 두 차례나 일어나 경복궁의 지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방원이 옹립한 정종은 권력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재위 2년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며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 뒤 정종에게서 양위 받은 태종이 재위 5년에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면서, 정궁인 경복궁을 비워두고 경복궁 동쪽 향고동에 궁궐을 새로 지어 '창덕궁'이라 이름 지었다.
참고 자료
창덕궁 - 세계문화유산
http://www.cdg.go.kr/main/main.htm
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EC%B0%BD%EB%8D%95%EA%B6%81
최재숙, <창덕궁>, 웅진주니어,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