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9.05.24
- 최종 저작일
-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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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1) 윤치호의 일생
2. 윤치호의 활동
(1) 사회개혁 운동
(2) 친일활동
3. 윤치호, 그리고 나
(1) 윤치호에 대한 내 평가
본문내용
1. 윤치호 그는 누구인가.
(1) 윤치호의 일생 및 활동사항
윤치호는 1866년 12월 21일 충청도 아산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조선 말기에 일본·미국 등에 유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의정부 참의, 학부협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제국 기에는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작 작위를 습작하였으며,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회장, 조선체육회 회장, 중추원 고문, 연희전문 학교 교장,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6일 개성 자택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1879년 어윤중 문하에서 수학하기 시작하여 1881년 4월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의 알선으로 4월 도쿄 도진 샤에 입학하여 게이오의숙에 입학한 유길준, 유정수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도쿄 유학생이 되었다.
1882년에는 도쿄대학 철학교수의 부인 밀 레트와 도쿄대학 영어강사 간다 나이부로부터 영어를 배웠다. 체류 중 김옥균 · 서광범 ·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 유키치·나카무라 마사 나오 등과 교유하였다.
<중 략>
3. 윤치호, 그리고 나
(1) 윤치호에 대한 나의 평가
윤치호는 처음 독립 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넘어간 사람으로 보이고 현재도 후손들에게 친일파로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윤치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왕성한 활동을 펼쳤었다. 하지만 개화시기 이후 조선의 개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의 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며 친일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친일파로 남아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죽음에 이르면서 “모든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는 삼가라”라는 말을 남겼고 이와 윤치호의 일기를 토대로 다시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내가 생각 하기엔 윤치호는 개화에 찬성 했던 것이지 친일로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에 협조 하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개화의 방법에서 일본에게 배우고 식민통치를 하려 했던 일본에 간다는 것에서 친일로서 보일 수도 있다.
참고 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윤치호[尹致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0398&cid=46623&categoryId=46623
[네이버 지식백과] 윤치호 [尹致昊]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570922&cid=51930&categoryId=54216
윤치호의 개혁운동과 친일활동 - 김윤희 2007.8 p.10, p.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