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璽寶의 개념
Ⅲ. 高宗代 璽寶의 기록
Ⅳ. 高宗代 璽寶 印鈕의 양식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고종의 즉위를 전후한 시기의 조선은 지정학적으로 열강들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미국·영국·독일 등 서양 각국과도 수호통상을 체결하며 국제 사회와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고종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다방면의 개혁을 시도한다. 한편 일본은 청일전쟁(1894~1895)을 일으키고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는 등 침략을 본격화하였다. 고종은 국제관계에서 보다 자주적 기틀을 마련하고자 1897년 연호는 ‘광무’, 국호는 ‘대한’이라 정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현재 고궁박물관 소장 어보 중 고종대에 가장 많은 어보가 만들어졌다. 무려 316과 중 101과(32%)의 어보를 만들었다. 다음으로는 영조 48과(15%), 철종 30과(9.5%), 숙종 28과(8.9%), 정조 21과(6.6%)순이다. 또한 어보의 제작과 현존 유물의 숫자를 따져볼 때에도 19세기 이후에 만든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것은 이전시기의 유물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18세기 이후 급격히 많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새보의 개념과 문헌기록, 인뉴의 양식분석을 통하여 이 시기 급격하게 많은 양의 인장을 만든 시대적 상황과 이유에 대해 고찰해보고자 한다.
Ⅱ. 璽寶의 개념
조선시대의 새보는 국가의 상징이나 왕위 선양,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國璽와 국왕을 포함한 왕실의 공식인장인 御寶를 모두 포함한다.
본래 ‘국새’라는 용어는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의 국새와 대보는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의미로만 쓰였는데,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하며 각종 의전 및 행정업무와 외교문서에 사용하는 집무용 성격을 띠고 있다. 또한 왕위 계승 시에는 ‘나라를 물려주는 전국의 징표’로 전수하였으며, 국왕의 각종 행차 시에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행렬의 앞에서 정중히 운반하였다.(도 1)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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