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의 역사학은 애초부터 단순히 하나의 학문으로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민족 독립 운동의 핵심이라는 측면이 더 강했다. 특히 일제가 우리 민족을 강점하고 우리의 역사를 왜곡·날조하는 데 적극 대항하면서 민족정신을 고양하는 데 가장 크게 공헌한 것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었다.
일제는 강점 이전부터 그들의 침략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계속해 왔으며, 강점 이후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체계적인 역사 왜곡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그 주장의 요지는 한민족은 본래 주체성이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는 타율성론, 오랫동안 자체의 힘으로는 발전하지 못하고 후진 상태에 계속 머물러 왔다는 정체성론,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파당을 지어 당파 싸움만 일삼는 성질을 갖고 있다는 당파성론 등이다. 이 같은 주장을 통해 한민족은 본래 열등하며, 일제의 통치를 받는 것은 당연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발전과 은혜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강요하려 했다.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 등은 이 같은 일제의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적극 비판하고 민족주의 역사학의 기초를 다지는 한편 독립투사로서 항일 민족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신채호는 1905년 무렵부터 국사 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1910년까지 각종의 영웅전과 더불어 근대 역사학의 기초를 다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썼다. 그는 일제 강점으로 중국에 망명한 후에는 『조선사(朝鮮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등을 저술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자아성을 상실하고 사대주의의 노예성에 빠졌기 때문이라 했다. 그런데 사대주의 노예성은 고려 전기 '묘청의 난'에서 소위 국풍파(國風派)가 김부식 등 사대주의자들에게 패한 이후 활개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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