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전투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조광환
- 최초 등록일
- 2018.11.23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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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글을 정리하면서
1. 황토현전투 전개 과정
1) 백산 기포 이전 동학농민군의 동향
2) 황토현전투 이전의 동향
3) 황토현전투 상황
2. 황토현전투의 성격 및 의의
3. 황토현전승일과 동학농민혁명기념일
1) 최근 학계의 동향과 무장봉기설에 대한 문제 제기
2) 동학농민혁명 기념일과 황토현 전승일
본문내용
1. 황토현전투 전개 과정
1) 백산 기포 이전 동학농민군의 동향
전봉준, 서장옥 등 사회변혁 세력은 최소한 1892년 삼례집회 때부터 강한 혁명의 의지를 지녔으며, 1893년에 있었던 사발통문거사계획 이전에 봉기에 대한 사전 논의가 있었으나, 시기를 놓고 의견이 달라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이 아닌 조병갑의 탐학과 관련하여 직접적 이해관계에 놓인 고부농민들과 함께 1894년 정월 고부농민봉기를 일으켜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이후 전봉준이 고부농민봉기를 이끌던 1894년 2월 20일경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궐기를 촉구하였다. 한편 전봉준과는 달리 혁명의식으로 무장되지 못한 고부농민들의 해산으로 말미암아 전봉준은 불가피하게 茂長으로 달려가 손화중을 설득하여 고창 林川에서 일어났으며, 앞서 보낸 격문에 의해 무장 및 영광 일대에서 모여든 것으로 추정되는 농민군 또한 茂長 구수마을서 집결한 후 약속된 장소인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때 태인과 부안 등지에서도 고창 林川과 茂長 九水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정 장소에 집결하여 백산으로 모여 들었으며, 드디어 백산에서는 고창, 무장, 흥덕, 부안, 정읍, 태인, 금구, 김제, 전주, 영광, 구례, 곡성 등지에서 모여든 동학교도와 민중들로 군사대오를 형성하였고 “호남창의대장소”란 이름의 지휘본부를 두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호남”이라는 이름이다. 고부나 무장, 태인, 금산 등 어느 한 지역의 농민들의 봉기가 아닌 호남 일대의 농민들이 모여 衆議로 전봉준을 총대장(總大將)으로, 김개남·손화중을 총관령(總管領)으로, 김덕명·오시영을 총참모(總參謀)로, 최경선을 영솔장(領率將)으로, 송희옥·정백현을 비서로 선출하는 등 그 지휘체계를 갖추었으며, 본격적인 군사대오를 구성하고 또 그 봉기 목적을 담은 격문을 발표함으로써 봉기의 뜻을 분명히 하고 외세와 더불어 횡포한 양반과 부호, 방백, 수령 등 관료 對 민중, 小吏로 彼我구분을 분명히 하여 선언하였다. 그리고 4대 名義을 통해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