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원삼국시대 용어 사용의 문제
Ⅲ. 편년
Ⅵ. 원삼국시대의 주거문화
Ⅴ. 주거지의 기본구조
Ⅵ. 이전시기와의 비교
Ⅶ.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원삼국시대는 故김원용이 『한국고고학개설』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사용한 시대구분 용어이다. 원삼국시대의 뜻은 ‘원사시대의 삼국시대’라는 의미의 원(proto)삼국시대로 명명한 것이다. 원삼국시대는 본격적인 철기의 생산이 시작되고 청동기가 소멸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도작이 발전했고, 지석묘가 소멸되었으며 타날문토기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원삼국시대의 주거지의 획기적인 변화는 주거지 내부시설로 구들이 확인되며, 呂자형·凸자형 주거지의 등장으로 기존의 소형의 방형이었던 주거지가 대형의 주거지로 변하게 되었다.
나아가 원삼국시대의 취락의 특징으로 분묘구역이 취락에서 독립되고 취락이 사회·경제적 목적에 따라서 재편되게 된다. 사회․경제적으로 재편된 취락들은 단위취락별로 긴밀한 네트워크망을 형성하였으나 원삼국 Ⅲ기에 들어 정치적 요인에 의하여 네트워크망이 급격하게 경색된다. (박경신 2012)
본고에서는 원삼국시대의 주거지를 송만영(2013)이 ‘중도식주거지’와 ‘마한계주거지’로 나누어 구조를 파악해보고, 수계별로 어떠한 양상을 보이는지 파악하고, 마지막으로 이전시기와 비교분석해보려한다.
Ⅱ. 원삼국시대 용어 사용의 문제
문헌사학계에서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애초에 사용하지 않았고, 고고학계에서도 비판을 받아왔다. 고고학계에서는 김정배(1996), 이청규(2007), 이현혜(1993)등이 원삼국시대 용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용어의 사용을 비판하였다.
먼저 김정배는 원삼국시대라는 용어 자체의 모순을 지적했다. 김원용이 ‘원사시대의 삼국시대’라는 의미에서 ‘원(proto)삼국시대’라고 이름붙인 것에 대해 원사시대와 삼국시대는 매우 이질적인 단계이므로 양자는 결합될 수가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김원용이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각각 1기와 2기로 나누고 청동기2기와 철기1기를 초기철기시대로 부르는데서 나타난 부작용으로 보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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