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과 김구의 역사적 평가와 의미 및 의견(A+)
- 최초 등록일
- 2018.09.11
- 최종 저작일
- 20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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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과 김구의 역사에 드러난 공적과 과오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또한 그러한 내용을 토대로 인물에 대해 성장 배경 및 삶의 방향을 드러다 보고
그것을 통해 필자의 의견까지 제시해 놓았습니다.
과제에 많은 활용 바랍니다.
목차
1. 현실적인 외교노선 이승만, 혁명적 투쟁노선 김구
2. 왕족의 후손 이승만, 상민의 후손 김구
3. 과거에 낙방한 후 서양과 동양으로 갈라진 두 사람
4. 옥살이하게 된 두 사람
5. 대통령과 경무국장으로 만난 역사의 두 획
6. 해방정국에서 달라진 이승만과 김구
7. 이승만과 김구의 끝
8. 결론 - 역사적 평가 및 의견
본문내용
현실적인 외교노선 이승만, 혁명적 투쟁노선 김구
광복 이전 첫 공화정을 대표한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는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동시에 라이벌입니다. 경쟁자였던 두 사람은 너무나 비슷하면서도 대조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정치인물로읽는우리역사 기말고사를 통해 평상시 알지 못하였던 이승만과 김구에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아보고 저의 생각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왕족의 후손 이승만, 상민의 후손 김구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에서 5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었지만 몰락한 왕족의 후손이었고 집안의 형편이 좋지 않아 빈촌인 능안골로 낙향하였습니다. 그래도 이승만은 왕족의식이 대단히 강해서 대통령 재위 시 “과인이 덕이 없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7대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아버지를 닮아 반항적 기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네 양반들의 괄시 속에 ‘상놈’의 한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랐습니다.
한 사람은 왕족의 후손으로, 다른 한 사람은 상민의 후손이었지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같았습니다.
과거에 낙방한 후 서양과 동양으로 갈라진 두 사람
두 사람 다 한학을 공부하면서 과거시험을 목표로 삼았지만, 똑같이 낙방하였습니다. 낙방한 후 이승만은 미국 선교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해 6개월 만에 배재학당의 영어교사가 되었고, 신학문을 접하며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김구는 관상 공부를 하던 중 ‘얼굴 좋음이 몸 좋음만 못하고, 몸 좋음이 마음 좋음만 못하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를 결심하고 동학당에 가담하여 접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20세를 전후해 이승만은 서양적인 것을 지향하고 김구는 동양적인 것을 지향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차이점이 이승만에게 개화운동에, 김구에게 동학농민운동에 참여케 하는 싹이 되었습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