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수립
- 최초 등록일
- 2018.08.27
- 최종 저작일
- 2018.06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머리말
2. 대한제국의 수립배경
3. 대한제국의 수립과정.
4. 맺음말.
본문내용
1.머리말
을미사변으로 인해 국민의 대일감정은 극단적으로 악화되었고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서 실시되던 개혁에 반발하며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기회를 틈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이범진 이완용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데리고 온다. 이러한 사건은 정국을 완전히 번복시키게 되는데 이로 인해 기존의 내각은 붕괴하였고 이범진 이완용등을 등용하며 친러세력이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1년 동안 조선은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러시아인 고문과 사관이 초빙되었고 많은 이권들이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결국 국민의 비난이 집중되고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자’ 라는 수많은 의견을 따라 고종은 1년 만에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이후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왕을 황제라 칭하며 국내외에 독립 제국임을 선포한다. 이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은 외형과는 다르게 상당히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기점으로 한 것 역시 경운궁 주위에 있는 수많은 외국 공사관의 보호에 의지하려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제국을 설립한 이후에도 많은 이권을 빼앗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과연 고종이 제국을 자칭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 시기 속 제국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 이였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서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제국(帝國)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표현은 일본서기에서 단 한번 정도 언급 되어 있을 뿐 일반적으로 제국이라는 용어는 사용된 적이 없었다. 그랬던 이 제국이라는 용어는 1850년대 일본에 의해 다시 찾아볼 수 있게 된다. 일본의 막부정권은 외세에 압박에 직면하게 되면서 ‘자주독립한 국가 정체성’의 표지로 일본제국 이라는 개념을 채택한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교류하기 시작하면서 제국 이라는 단어를 마주하게 되고 조선 역시 일본과 같은 이유로 자주권을 주장하고 황제의 전제권을 정당화 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자료
한국근현대사학회,『한국 근대사 강의』, 한울, 2007
이삼성, 『제국’ 개념과 근대 한국- 개념의 역수입, 활용, 해체, 그리고 포섭과 저항』, 한국 정치사상학회 정치사상연구 17(1), 2011.5, 59-104 (48 pages)
이성환 고종의 외교정책과 러일전쟁. 일본문화연구, 35, 327-348 2010.7
현광호 (2008). 대한제국기 고종의 대영 정책. 한국사연구, (140), 221-248.
왕현종 (2010). 대한제국기 고종의 황제권 강화와 개혁 논리. 역사학보,
208, 1-34.
도면회 (1996). 공동연구: 대한제국기 권력기구의 성격과 운영총론: 정치사적 측면에서본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 역사와현실, 19, 14-39.
이기백, 『한국사 신론』, 일조각, 2004
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0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