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연세대 신촌 전공수업 레포트입니다. 해당 수업 취득 학점은 A+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농민전쟁의 개괄적 양상
Ⅲ. 동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쟁
Ⅳ. 고부에서의 봉기에 관한 논쟁
Ⅴ. 대원군과 관계에 대한 논쟁
Ⅵ. 전봉준의 사상적 지향점
Ⅶ. 평가 및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 이후로, 조선 농민 대중의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내면적 원동력의 차원에서 연구되어 왔다. 8·15 광복 이후에 농민전쟁에 대한 연구는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차원과 더불어 반봉건 반침략투쟁의 관점에서 이루어졌으며 80년대 민중사학의 등장과 함께 민중을 사회개혁의 주체로 보는 민중의식의 확산과 함께 관련 연구가 진행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의 축적은 1994년 농민전쟁 발발 100주년을 기념한 각종 학회와 연구 발표에 의해 정점을 찍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전쟁의 주도적 인물인 전봉준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진한 채로 남아있다.
전봉준(1855~1895)의 자는 명숙이며 장의(掌議)출신의 유생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집안은 대대로 지체 높진 않지만 양반가문에 속하였다. 그의 직업은 선비이고 생활형편은 세 마지기 전답을 갖고 아침 밥, 저녁 죽으로 살아갔다는 심문 기록을 고려할 때 넉넉하지 않았으며, 전형적인 빈농 출신의 지식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프롤레타리아적인 출신배경을 갖고 있는 그의 삶은 향후 농민전쟁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로 평가되며 여타 행적에 있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예컨대 그의 출생지가 어디인지에서부터 연구자들 간의 논란이 있었으며 그의 가계에 대한 부분 역시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비록 그의 출생지는 전북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로 학계에 합의가 이루어졌고 가계와 후손에 대한 논란도 일단락되긴 하였지만 아직도 그의 삶과 행적에 대한 논란과 의견의 불일치는 학계에서 계속 되고 있다,
빈한한 유교적 지식인이면서도 농민군을 이끌며 사회변혁을 주창했던 그의 삶은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중첩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병존할 수 없는 모순의 형태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와 같은 삶은 사회개혁세력과 반동세력, 이에 더한 외세의 이권침탈이라는 삼중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19세기 최 말기 조선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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