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원문 및 해석(청양)
- 최초 등록일
- 2017.10.11
- 최종 저작일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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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청양현(靑陽縣)
동쪽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1리이고, 북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청무(靑武)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는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다시 홍주(洪州)로 이속시켰던 것을, 본조에서는 태조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중 략>
【인물】 고려 이자송(李子松) 덕흥군(德興君)의 변란 때에 자송이 원 나라에 있었는데, 원 나라 황제가 고려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덕흥군을 따라 본국으로 가라고 하는 것을 자송이 숨어서 따라가지 않고 오랫동안 북경에 살고 있으면서 전량(錢糧)이 모두 떨어져도 시종 그 절개를 변하지 않았고, 이미 돌아와서는 왕이 그 절의를 가상하게 여겨서 공신(功臣)의 칭호를 내렸다. 그 뒤에 신우(辛禑)를 간할 때에, “수렵과 놀이를 경계하고 술과 여색(女色)을 삼가십시오.” 하였더니, 신우가 좋아하지 않아서 관직을 파면하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하였다. 최영(崔瑩)이 신우에게 요동(遼東)을 공격할 것을 권고함을 듣고, 자송이 최영의 집으로 가서 그 불가한 바를 극력 말하였다. 최영이 이 사실을 신우에게 고하며 임견미(林堅味)에게 아부한다 칭탁하고 그를 죽였다.
추가.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현종 9년에 고쳐 정산(定山)에 예속시켰다가 15년에 다시 없애 버렸다.
【방면】 현내 끝이 5리이다. 동상(東上)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7리, 끝은 20리이다. 남상(南上)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남하(南下)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서상(西上) 서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서하(西下)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북상(北上)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북하(北下)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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