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의 성격과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7.09.30
- 최종 저작일
- 20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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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갑신정변의 성격
2. 갑신정변의 평가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9세기 후반에 들어 서구제국주의 열강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중국과 일본은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새로운 성격의 국제질서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한편, 아직까지 봉건적 지배체제를 청산하지 못한 채 있던 조선은 서구 제국주의를 경험한 청과 일본의 침투로 위기를 맞는다. 그리하여 조선은 밖으로는 청과 일본, 서구열강의 침략위기를 극복하고,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모순을 타파하여 자주적 근대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주도 세력이 개화파이다. 이들은 조선의 개화 방법을 둘러싸고 일본을 모델로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려는 급진개화파와 기존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면서 근대적 생산력을 통한 부국강병을 바라던 온건개화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 급진개화파는 김옥균을 비롯한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의 신진엘리트로 중심이 되었고 '개화당, 독립당'이라 불렸다. 그들은 해외시찰단으로 일본과 미국에 파견되었으며, 파견을 통해 조선 주변의 국제적 권력구조가 급격히 변동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청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근대적 정치사회제도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특히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으로 파견되었던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의 신식문물을 보고 배우며, 일본의 근대화를 모델로 하여 조선도 일본처럼 단시간 내에 개화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하여 당시 조선의 집권세력이었던 ‘사대당, 보수당’이라 불리는 온건개화파는 적극 반대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었고, 김옥균과 젊은 엘리트들은 청의 종주권 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1884년 12월 4일 밤 우정국 개국을 축하하는 만찬회를 이용하여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갑신정변은 3일 만에 청군의 의해 진압 당하면서 실패로 끝이 나고 김옥균과 박영효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삼일천하’라고 불리는 갑신정변에서 급진개화파가 주장한 14개조 정강은 근대화된 정치적 개혁과 실현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참고 자료
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연암서가』, 2012, 141쪽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소명출판』, 2008
정희윤, 「갑신정변 전후 급진개화파의 일본인식」,『숙명여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 논문』,2006.2, 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