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변화와 실학의 발달
- 최초 등록일
- 2017.09.24
- 최종 저작일
- 2017.05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목차
1. 여는 글
2. 性理學의 敎條化와 反省
3. 實學思想의 成立
4. 實學思想의 展開
5. 實學의 基本的 性格과 限界
6. 매듭 글
본문내용
1. 여는 글
어느 시대와 국가를 불문하고 한 사회를 선도해가는 시대사상은 항상 존재해 왔다. 이러한 시대사상은 정치, 사회, 경제의 다양한 제도에 반영되어 한 시대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추구하는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존의 사상이 문란해지면 이러한 사상에 기반해 탄생했던 제도 역시 존립 기반을 잃고 붕괴되기 시작하며, 제도의 붕괴는 곧 民의 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심각한 민생파탄을 야기하게 된다.
이같은 혼란한 사회상은 우리 역사 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데,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이 이와 매우 유사하다. 조선시대는 고려 말의 불교 폐단을 ‘성리학’이라는 사상을 통해 해결해나갔고, 성리학은 각종 제도에 적용되면서 당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해 탄생되었던 제도들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모순을 드러냈고, 민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배층은 17세기 이후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화를 외면하고, 卓上空論을 일삼으며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그 피해는 모두 民이 받아야만 했다.
이처럼 성리학이 절대화되는 가운데,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고자 국가 사회 체제를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이 등장하였으니, 그들이 바로 조선후기의 실학자들이다. 대표적 중농주의 실학자인 유형원은 ‘오늘날에 부족한 것은 강론이 충분하지 못한데 있지 않고, 오직 강론만 하고 시행하지 않는 것에 있다’면서 당시 지배층의 空理空論을 전면 비판하였으며, 정약용은 사회 개혁을 통해 백성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하면서 제도에 따른 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하였다.
지금부터는 이러한 실학이 활발히 전개되기 이전, 성리학이 교조화되고 분화되었던 조선시대 후기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던 실학이 어떻게 성립되었는지를 알아볼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사』 35, 국사편찬위원회, 1998
『한국사』 14, 국사편찬위원회,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