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학교 / 서양의 역사와 문화] 마리 앙투아네트
- 최초 등록일
- 2017.07.18
- 최종 저작일
-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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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경북대학교 교양과목 <서양의 역사와 문화>의 과제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와 평가를 다룬 레포트입니다.
목차
1. 보고서 작성 일지
2.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공주
3.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4. 혁명의 서곡, 다이아몬드 목걸이
5. 바렌느 국왕 일가 도망 사건
6.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본문내용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공주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공주는 1755년 11월 2일, 오스트리아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사이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당시 프로이센의 위협을 받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녀들을 외국의 다른 가문들과 혼인시킴으로써 외국과의 동맹의 강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그동안 적대국이었던 프랑스와도 동맹을 맺기 위해서 자신의 딸을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프랑스 역시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이 필요하여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 사이의 정략결혼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의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Louis Auguste)와 혼인하기로 예정되어있었으나, 나폴리 왕세자와 결혼하기로 한 바로 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죽는 바람에 마리아 카롤리나가 요제파를 대신하여 나폴리 왕세자에게 시집가게 되며, 그로 인해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와의 혼인을 약속하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쇤부른 궁전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란 마리아 안토니아는 독일어를 비롯하여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의 외국어와 댄스, 음악 등을 배웠으나, 교육에 대한 성과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리아 안토니아와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이 약속된 후, 프랑스 왕실은 미래의 왕비를 교육하기 위해 베르몽이라는 주교를 파견해 공주의 가정교사로 삼았는데, 주교는 공주를 두고 ‘지능과 이해력은 높지만 게으르고, 공부에 대한 열의가 부족하여 집중하려 들지 않는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녀는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상냥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타고난 우아함과 기품, 예쁜 용모, 그리고 뛰어난 예술성을 지녔다고 한다.
참고 자료
Lasky, Kathryn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문학사상
Thomas, Chantal 『마리 앙투아네트』 이레
김복래 『프랑스 왕과 왕비 : 왕의 총비들의 불꽃 같은 생애』 북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