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 론
Ⅱ. 여말선초의 사회적 배경
Ⅲ. 정도전 · 이방원의 생애와 정치사상
1. 정도전의 생애와 정치사상
1) 정도전의 생애(~1392)
2) 정도전의 정치사상 – 재상중심적 신권론.
2. 이방원의 생애와 정치사상
1) 이방원의 생애
2) 이방원의 정치사상
Ⅳ. 정도전 vs 이방원
Ⅴ. 결 론
Ⅵ.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 론
우리는 조선을 강력한 왕권국가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조선의 성리학은 중국의 남송 대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권 세력을 옹호했다. 당초 정도전을 비롯한 세력들은 역성혁명을 일으킨 뒤 성리학의 왕도 이념을 좇아 조선을 왕권보다 신권이 우위에 있는 이른바 ‘신권 국가’를 만들고자 했으나 이내 이방원에게 제거되고 말았다. 이후 조선은 태종과 세종, 세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혈 정변이 일어났으나 대체로 강력한 ‘왕권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는 왕권이 강력했지만 연산군이 폐위된 이래 신권이 급속히 강화되기 시작했다. 신하들이 보위를 마음대로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뒤이어 광해군 마저 폐위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조선의 군왕은 당쟁의 그늘 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의 역사는 ‘신권과 왕권의 대립’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럼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가? 바로 조선의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과,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이방원의 대립이었다. 이 둘의 만남은 어떠했고, 어디서 엇갈렸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제부터 알아보자.
Ⅱ. 여말선초의 사회적 배경
무신집권 이후 고려의 왕권은 이름뿐이었다. 무신집권시대에는 무신에 의해서 왕위의 폐립(廢立)이 이루어졌고 원 간섭하에서는 원에 의해서 왕위가 결정되었다. 공민왕 이후에도 신권에 의해서 왕위의 폐립이 좌우되었다. 국정의 운영은 구심점을 잃고 무궤도하게 이루어졌다. 국가경제의 기반인 토지는 권문세족·사원세력·권신에게 점유되어 국가재정은 고갈을 면할 수 없었으며 다수의 민은 가혹한 착취로 빈궁에 허덕였다. 더구나 몽고의 침입,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등 계속되는 전란으로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불교는 고려 후기로 내려오면서 많은 폐단을 드러냈다. 사원전의 확대로 인한 세수감축, 유역자의 사원으로의 도피에 따른 생산력·군사력의 약화, 사찰의 남설(濫設)과 빈번한 불교행사로 인한 국력의 낭비, 승려들의 세속화 등으로 불교는 더 이상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참고 자료
『朝鮮太祖實錄』
『朝鮮太宗實錄』
『朝鮮世宗實錄』
박원호, 『명초조선관계사연구』, 일조각, 2002.
신동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이성무, 『조선을 만든 사람들』, 청아출판사, 2009.
이한우, 『이한우의 군주열전 -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 해냄출판사, 2005.
조유식, 『정도전을 위한 변명』, 푸른역사, 1997.
편집부 저, 『한국사 22 – 조선왕조의 설립과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1995.
김석근, 「조선의 ‘건국’과 ‘정치체제 구상’에 대한 시론적 접근」, 『동양정치사상사』 제 7권 제 2호,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08.
선병철, 「정치적 야망에 휩쓸린 인간군상들 - 정도전과 이방원의 만남」, 『지방행정』 46권 525호, 대한지방행정공제회, 1997.
신석호, 「조선 왕조 개국 당시의 대명 관계」, 『국사상의 제 문제』 제 1집, 국사편찬위원회, 1959.
최상용, 「정치가 정도전 연구」, 『아세아연구』 제 46권 제 1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03.
최연식, 「여말선초의 권력구상 - 왕권론, 신권론, 군신공치론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 32권 3호, 한국정치학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