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인리히 불링거
- 최초 등록일
- 2017.05.26
- 최종 저작일
- 2017.04
- 1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불링거의 성장기(1504-1522)
2. 불링거의 활동초기(1523-1531)
1) 교사 불링거
2) 목사 불링거
3. 츠빙글리의 후계자 (1531-1575)
1) 취리히교회 취임
2) 제도 확립
3) 주석 편찬
4) 설교
5) 저술
6) 신앙고백서
7) 서신
4. 맺는 글
본문내용
요한 하인리히 불링거(Johannes H. Bullinger, 1504~1575)는 단지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의 뒤를 이은 후계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불링거를 바라보는 눈이 달랐다.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에게 아첨한다고 생각하지 마시오. 나는 그대를 취리히(Zurich)뿐 아니라 온 유럽의 사도라고 여기고 있소”(Berchthold Haller 1535).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츠빙글리 대신에 젊은 감독, 아주 귀중한 사람, 경건하고 바르고 박학하고 신실하고 헌신적인 사람, 아무하고도 비교할 수 없는 설교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는 설교를 통하여, 밖에 있는 모든 기독교 안에서는 문서를 통하여 은사를 넘치도록 지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입증 되었습니다”(Konrad Pellikan 1544).
“우리의 가장 좋은 아버지”(Calvin).
“취리히 사람들에게, 스위스의 다른 개신교 신앙인들에게, 또한 독일 사람들에게, 불란서 사람들에게, 영국 사람들에게 사도라고 불린다”(Beza).
취리히 개혁교회 총회(synod) 수장이고 그로스뮌스터(Grossmunster)교회 수석목사였던 불링거는 루터나 칼뱅, 취리히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에 비해 오랫동안 과소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취리히 개혁을 탄탄하게 이끌어갔고, 또한 언약신학을 개혁교회 신학의 중심적인 위치에 정립시켰으며, 「제2스위스 신앙고백」을 집필하여 스위스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여타지역의 개혁교회 신앙전통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된다.
1. 불링거의 성장기(1504-1522)
불링거는 1504년 7월 18일에 취리히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작은 도시 브렘가르텐(Bremgarten)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Heinrich Bullinger senior)는 교구사제였으며 어머니는 시의회 의원의 딸인 안나 위데르케르(Anna Wiederkehr)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