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의리에 기초한 정치가
2. 다양함을 생각한 학자
3. 국어ㆍ국문 문학론을 주장한 문학 비평가
4. 시대를 다룬 통속문학을 연 선각자
5. 마무리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의리에 기초한 정치가
서포의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며, 충렬공 김익겸(金益謙)의 유복자이다. 서포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에 따라 대소사에 매달리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하였으나, 이는 당파적 견해가 들어간 것이며, 그는 이와 달랐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생동안 높은 자리에 많이 오르게 되었다. 지방관직이나 무관을 일이 없이 계속해서 조정의 삼사(三司)와 시강원 및 이조 병조 등의 청요직(淸要職)에 배속되었고, 또 시독관, 시강관, 경연관, 지경연 등을 겸직하며 거의 지속적으로 경연에 참여했다. 이것은 그의 가계적 배경이나 학통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사실은 그가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경사에 해박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의리를 중시하고 직언으로 정도를 추구하려는 유자적 자세가 공감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척신이었지만 왕과 왕실의 여러 문제에서 왕의 편에 서기보다는 늘 직언을 함으로써 엄정하고 비판적인 입장에 서있었다. 그러나 민심 복제문제와 허적의 재상 임용상의 문제를 시작으로 갑인예송에 이르자, 현종의 배척을 받아 선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의 파직과 추고, 그리고 관작삭탈과 원지 유배를 당하였다. 그는 삼사에 재직하는 본령을 “의리에 기초하여 직간을 함”으로 정하고, 왕과 신하의 불신을 늘 우려하였다.
언로가 점차 막히고 곧은 기운이 꺾인 것이 오늘날의 큰 걱정거리입니다. 지난해 (직언을 하다가) 귀양갔던 여러 신하들이 이미 석방되었으나 아직도 폐기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아무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 풍조를 이루어 올바른 말이 들리지도 않고 있는 바, 입 다물고 있는 폐단이 끝내는 아부하며 영합하는 데 이를 것입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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