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중빈의 생애
박중빈은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에서 박성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범상치 않았으며 신의가 있었다. 7살에 맑은 하늘을 보고 우주와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인간의 생사와 존재 문제로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서당과 같은 일상적 교육방법이 이러한 회의를 풀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독자적인 구도의 길을 택하였다.
박중빈이 11살이 되던 해 산신이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것으로 믿고 산신을 만나기 위해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렸다. 이어 16살 때부터 20살 때까지는 도사를 만나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박중빈의 구도생활을 도와주었던 아버지가 죽고, 도를 얻기 위한 노력 또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의문들이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 라는 생각으로 모아졌다.
박중빈은 25살 때 모든 생각을 잊고 수도에 들어가 이듬해인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 날에 그는 우주와 세계의 새로운 질서를 뚜렷이 알게 되었는데 그 질서를 만유의 한 체성이며 만법의 한 근원이라 표현하고 불생불멸과 인과응보의 진리를 천명하였다. 원불교에서는 이 날을 개교일로 정하였다.
그는 유불선 3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기독교의 구양과 신약을 두루 연구한 결과 특히 금강경의 내용이 자신이 깨달은 진리와 크게 일치함을 보고 근본적 진리를 밝히는 데는 불법이 제일이라 하여 석가모니불을 선각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펴기 위해서는 기존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로운 불교교단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그는 불교의 현대화와 생활화를 주장하여 신앙의 대상이 불상이 아닌 법신불의 일원상으로 삼고 시주, 동냥, 불공 등을 폐지하는 대신에 각자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며 교화사업을 시행한다는 이른바 생활불교를 내세웠다.
이때부터 박중빈은 당시의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바라본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끌려 다니는 인류의 정신을 구원하기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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