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식민도시 전략화로 인한 전통 건축양식의 파괴에 대한 고찰 리포트로 저의 생각을 위주로 하여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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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식민도시화 전략 원형의 이식과 전통의 파괴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 관하여 고찰하고 균형 잡힌 시각을 통해 역사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 글의 목적이라고 당부한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화하는 과정에서 자행한 여러 전통적 공간질서의 파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일본이 치밀하고 주도면밀하게 한국 전통의 명맥을 끊으려는 목적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쿠후 시대 조카마치의 공간질서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신청사, 남산의 조선신궁 등 우리나라 건물에 대한 전유와 변용은 탁 트인 전망과 압도적인 외관 등 시각효과를 가장 중요한 변수로 고려하는 경성부의 오스망화 전략이었다. 또한 고건축에 대해서는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전반적인 무시와 특정 상징공간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세심한 고려라는 양면성을 지닌 작업이었다.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이라는 역사적인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인해 그것의 흔적을 제거 혹은 바로잡으려고 하는 작업이 강경하게 이루어진 편이다. 김영삼 문민정부(1993-1998) 때 실시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조선총독부 철거공사)은 일제가 만든 건물을 흔적도 없이 철거함으로써 기억의 말소를 실현하려 하였고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1998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공원화 과정에서 훼손되었던 일부 시설물의 원형을 복원하고 그 의미를 부각시켜 기념함으로써 오랫동안 망각되어온 식민지기의 장소성을 되살려내려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균형 잡힌 기억과 기념의 방식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완공 이래 1934년까지 약 20년간의 오욕의 역사로만 그 의미가 한정되었고 1948년 8.15 정부수립 선포식을 비롯해 9.2서울수복, 4.19혁명, 5.16 쿠데타, 12.12쿠데타 등 20세기 후반 40여 년 간의 정치적 격동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역사적 현장이었다는 사실은 ‘일제의 상징물’이라는 지배적 기표에 묻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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