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생애와 주요 서적, 사상 등을 네이버 지식백과와 학교 도서관 도서자료를 참고하여 제작함
목차
1. 퇴계 이황의 생애
2. 퇴계 이황의 주요 서적
3. 퇴계 이황의 주요 철학 사상
4. 감명받은 내용
5. 소감
6. 참고문헌, 사이트
본문내용
1. 퇴계 이황의 생애
이황(1501~1570)은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이며 연산군 7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리에서 7남1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국제적으로는 명나라의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국내적으로는 세종과 성종의 문화 융성기를 거쳐, 국운 쇠퇴의 조짐이 뚜렷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황은 12세에 작은아버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18세에는 <야당>이라는 글을 지었고, 그 글은 이황의 대표적인 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1527년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을사사화(1545)는 퇴계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환란이었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독서에 전념하며, 자신의 호를 퇴계(退溪)라 지었다.
그 뒤에도 관직을 제수 받고 사양하기를 반복하였으나, 끝끝내 퇴거할 수는 없어서 외직을 지망하였으나, 곧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되었다.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백운동 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 서원’을 건립하였다.
또 53세부터 죽을 때까지는 예조판서 등 높은 벼슬을 내려도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거두어 주길 간청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으며 교육과 저술에 전념했다.
54세 때 다시 학문으로 종신할 결심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독서함양으로 완전히 은둔하였다.
이후 <주자서절요>를 편집하고 <계몽전의> 등을 저술하여 주자학 이론체계를 정립하여 갔다.
1560년에는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하고, 이로부터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은 퇴계를 중용하고 사부로 삼고자 했으며, 퇴계의 문인들도 대거 등용했다.
하지만 퇴계는 명종에게 「성학십도」 등을 올리고 표연히 도산으로 발길을 돌려 독서와 교육에 남는 인생을 전부 바쳤으며 1570년 70세로 세상을 떠난다.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