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의 정치개혁
- 최초 등록일
- 2015.12.27
- 최종 저작일
-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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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공민왕의 즉위와 국내정치세력
3. 공민왕의 측근과 반란
4. 신돈의 등용 배경
5. 전민변정도감을 통한 개혁정치
6. 신돈의 실각과 개혁정치의 한계
7. 자제위 설치와 공민왕의 죽음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서론
고려의 공민왕은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다. 공민왕은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이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고려의 왕이다. 노국공주와의 사랑, 수많은 반란과 외침, 원나라와 결탁하여 고려를 좀먹고 있는 기철일파, 최영과 이성계, 자제위를 통한 동성애 의문, 신돈의 개혁과 실각 등 굴곡이 굉장히 많은 왕이다. 이런 공민왕의 정치개혁이라는 주제를 맡아서 공민왕에 대해서 조사해보니 과연 공민왕은 고려의 마지막을 막기 위해서 홀로 악전고투하는 성왕인가, 아니면 자신이 원나라에서 받았던 설움을 풀기 위해 원에 대한 복수심과 생존 투쟁의 산물인가. 공민왕은 자신의 측근이었던 조일신, 김용, 신돈 등을 냉정하게 제거한 것인가, 아니면 이들은 정말로 공민왕의 왕권에 도전을 했던 것인가. 이제 공민왕의 즉위부터 공민왕의 초기 정치개혁, 신돈을 통한 정치, 공민왕의 죽음까지 그의 일생과 정치 개혁의 과정을 살펴보면서 앞서 가졌던 의문들에 대해서 답을 구해보자.
2. 공민왕의 즉위와 국내정치세력
고려의 제 31대 국왕 공민왕의 이름은 전, 호는 이재怡齎와 익당益堂, 초명은 기祺이다. 몽골식 이름은 바얀티무르이다. 충숙왕의 둘째아들로 공원왕후 홍씨 소생이다. 1315년(충숙왕 2)에 태어나, 12세 때인 1341년(충혜왕 2) 순제의 입조 요구에 따라 원에 들어가 연경에서 살았다. 충숙왕은 평소 맏아들 충혜왕보다 둘째아들 왕기를 사랑하여 말년에 전라도 무송 출신의 과거 급제자 윤택에게 어린 왕기의 장래를 부탁했다. 그 때문에 왕기는 대원자라 불리면서 언제나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344년 충혜왕이 원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자 15세의 왕기는 당연히 국왕 물망에 올랐지만 원은 충혜왕의 맏아들인 8세의 충목왕을 선택했다. 고려의 국왕들 중 가장 어린나이로 즉위한 충목왕은 덕령공주에게 섭정을 맞기고 개혁정치를 펼쳤으나 4년 만에 병사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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