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역사와 근대의 모습- 인정전의 변화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5.11.04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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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창덕궁의 역사
3. 일본에 의한 창덕궁 인정전의 개조
4. 개조 이후의 인정전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창건하고 3대 태종 때 경복궁 동쪽 향교동에 정궁이 아닌 이궁으로서의 궁궐 조성이 있게 된다. 이듬해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궁의 이름을 창덕궁이라 하였다. 세종 즉위년에 확장 공사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되지만 이후 여러 왕들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정치적 의지에 따라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전체 공간 구성이 바뀌는 변화가 일기도 했다. 고종에 이어 대한제국의 2대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1907년 한 동안 빈 궁이었던 창덕궁으로 이어한다.
19세기 말 근대사회로 넘어가던 조선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궁궐도 그 변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국정을 논하는 정치의 중심 공간이자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정전역시 변화가 일어난다.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은 일본인이 주체가 되어 건축 과정 전체를 총괄하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인정전에서의 행사가 대폭 축소되었고 이마저도 황제의 참여 없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개조된 인정전은 이전의 개방된 구조에서 폐쇄된 구조로 변화하면서 국왕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행사를 할 수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화 된 인정전은 기존의 정전으로서의 상징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강제병합과 1926년 순종의 승하 이후 내외국인의 전시장으로 가치가 전락하게 된다.
기존 궁궐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면 경복궁이나 덕수궁에 비해 창덕궁에 대한 조명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로 시야를 좁혀서도 덕수궁에 대한 연구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근대사회로 나아가는 흐름 속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과 그 운명을 같이한 창덕궁의 역사를 조명해보고 궁궐 안에서도 중심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전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은 창덕궁의 수명이 짧았던 것과 상관없이 충분히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창덕궁에 대한 기존 연구가 많지 않은 관계로 적은 수의 논문과 단행본을 참고하여 창덕궁의 역사적 흐름을 검토해보고 본래 정전이 갖는 의미와 위상을 근대 일본에 의해 주도된 개보수 이후 창덕궁 인정전의 역할 변화와 비교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 자료
1. 단행본
국립고궁박물관 엮음, 『창덕궁 깊이 읽기』, 글항아리, 2012.
2. 단행본
장순용, 『창덕궁』, 대원사, 1998.
3. 단행본
한영우, 『조선의 집 동궐에 들다』, 효형출판, 2006.
4. 단행본
한영우, 『창덕궁과 창경궁』, 열화당, 2003.
5. 논문
이강근, 「근대기 창덕궁 건축의 변천에 관한 연구」, 『강좌 미술사』 42권 0호,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