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을 통해 본 조선시대 성리학 논쟁
- 최초 등록일
- 2015.06.22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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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서원 성립의 사상적 배경
3. 문묘종사 논쟁
4.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주지하다시피 조선의 건국이념은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 등에 대해 사색하면서 올바른 국가관과 사회관을 마련하기 위한 학문이었다. 실천적인 학문으로써 상리학적 체제의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화를 통해 모든 국가 구성원들이 덕이 있는 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중요하였다. 때문에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앙에 학교와 성균관을 설치하고 각 지방마다 향교를 두어 성리학적 이념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종대 이후로 성균관과 향교 등의 관학이 교화적 기능 보다 관료로 진출하기 위한 과거 준비 기관으로 변질되게 되면서 그 본연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성종때부터 중용되기 시작한 사림들을 중심으로하여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창건한 백운동 서원이었으나 이는 교화적 기능을 다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만조, ≪조선서원의 성립과정≫,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
하지만 이후 퇴계 이황의 서원보급운동을 시작으로 교학적 기능을 중심으로한 사림의 서원 설립이 계속되게 된다. 이후 서원은 지방향촌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이념적 중심지가 되었고, 나아가 향촌사회에서 사림들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기능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로 인하여 사림들이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서원은 더욱 증가하게 되었고 국가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아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사액을 받기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게 되었다. 게다가 중앙의 붕당정치와 연계되어 서원은 정치적 여론 형성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하는 조선사회에서 국가정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유학자들의 정치적 소견은 무시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많은 유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중앙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참고 자료
정만조, ≪조선서원의 성립과정≫, <조선시대 서원연구>, 집문당,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