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사 - 이인로와 이규보
- 최초 등록일
- 2015.05.16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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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시대 배경
3. 이인로
4. 이규보
5.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이인로(李仁老)와 이규보(李奎報)가 활동하던 당시는 고려(高麗)의 격변기라고 할 수 있다. 신분적으로 이인로는 고려전기의 문벌귀족(門閥貴族)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이규보는 무신란(武臣亂)으로 등장한 최씨정권(崔氏政權)의 문객문인(門客文人)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벌귀족이라는 신분이 무신란을 통해 무너졌다는 점에서, 문객문인이라는 계층이 무신란을 통해 집권한 최씨정권을 통해 나타났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두 인물은 동떨어질 수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논의 대상인 이인로와 이규보가 속한 시대의 상황을 살피고, 그 다음 이 두 문인이 어떠한 문학관, 창작론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교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둘 사이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알아보고 이것이 오늘날 어떠한 의의를 전해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시대 배경
고려전기(高麗前期)는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왕조의 변화가 총체적인 문화상황의 전면적인 변화로 곧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데다가, 고려가 건국되기 전 신라(新羅) 말의 혼란상으로 인해 궁예(弓裔), 왕건(王建), 견훤(甄萱)이 출현했다. 경순왕(敬順王)에게는 양도(讓渡) 받는 형식, 견훤에게 항복 받는 형식으로 고려는 건국되었고 발해(渤海)의 귀화인이 다수 있었다. 따라서 최치원(崔致遠), 최언위(崔彦撝), 최승우(崔承祐) 등의 작가들이 적지 않게 새로운 왕조에 참여하여 신라 말 고도로 향상된 문화 수준을 긍정적으로 계승하는 한편 고려시대 문화정치의 확립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고려전기에 한문학이 전성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관료제도(官僚制度)가 확립되었으며 지식인의 수요 증가했다. 늘어난 지식인의 수요에 자연스럽게 교육기관이 확충되었다.
서경에 행차하여 학교를 처음 설치했다. 이전에는 서경에 학교가 없었다. 왕이 수재 정악에게 명하여 그곳에 머물러 서학박사가 되게 하고, 따로 학원을 창건하여 육부의 생도를 모아 가르치게 하였다. 후에 왕이 그가 학문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비단을 내려 그를 권장하고 겸하여 의, 복 두 과목도 두게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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