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時代의 對外關係
- 최초 등록일
- 2015.04.17
- 최종 저작일
- 2014.09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1. 머리말
2. 高麗와 契丹[遼]
1) 국교 수립 이전 거란[遼] 인식
2) 국교 수립 이후 거란[遼] 인식
3. 高麗와 女眞[金]
1) 국교 수립 이전 여진[金] 인식
2) 국교 수립 이후 여진[金] 인식
4. 高麗와 몽고
5. 맺음말
6.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려인들은 ‘中國’을 天子國, 책봉국으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제후국으로서 위치를 짓는 외교 관계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국제관계는 일차적으로는 정치적, 군사적 힘의 우열에서 성립하는 것이지만, ‘中國’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인정하는 과정이 동시에 수반된다. 따라서 국가, 국왕[혹은 황제] 수준에서 조공과 책봉이라는 외교의례가 이루어질 때 문화적 교류가 수반되었다.
고려가 건국한 10세기 초 이래 중국 대륙의 북쪽에는 거란족의 遼가 존재했다. 1120년대 들어 중국에서 契丹이 몰락하고 여진족이 세운 金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 후에는 金과의 국교를 유지했다. 즉 고려는 건국 이래 金이 몰락하는 1220년대까지의 280여 년간에 한족왕조와 60년간, 거란족, 여진족에 의한 북방족 왕조인 遼와 金과 200여 년간 국교를 유지했다.
<중 략>
고려가 金과 관계를 맺는 것은 1115년 金 건국 이후부터이다. 1117년 3월 金은 황제 자격으로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여 관계를 兄弟관계로 맺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1126년에 이르면 金은 형제관계를 부정하고 스스로 고려에 대한 천자국으로 자임하면서 고려에게 제후국으로서 表文을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金과 고려의 관계를 君臣관계로 설정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종전의 고려-여진족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었다.
1125년 거란[遼]이 멸망하자 고려는 金과의 국교를 어느 수준에서 설정할 것인지 고민해야만 했을 것이다. 金의 요구에 따라 金을 책봉국으로 받아들이고 고려의 위상을 제후국, 조공국으로 인정하는 조공ㆍ책봉관계를 맺은 것은 1126년 4월이다. 그러나 고려가 金을 책봉국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복잡한 갈등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는 거란[遼]과 金이 교체된 직후인 1126년에 金=女眞으로 표현하였다.
참고 자료
김순자, 고려전기의 거란[요(遼)], 여진[금(金)]에 대한 인식, 한국중세사학회, 한국중세사연구, 제26호, 2009
이미지, 한국사에서의 변경, 변경으로서의 한국 ; 1231,1232년 대몽(對蒙) 표문(表文)을 통해 본 고려의 몽고에 대한 외교적 대응, 고려사학회, 한국사학보 제36호, 2009
강은정, 12세기초 고려의 여진정벌(女眞征伐)과 대외관계의 변화, 북악사학회, 북악사론 제9호,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