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역사문화유적 이야기, 곤릉, 석릉, 가릉
- 최초 등록일
- 2015.04.06
- 최종 저작일
- 20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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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강화도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고려시대 곤릉, 석릉, 가릉에 대한 재미있고 유익한 스토리입니다.
목차
① 곤릉 (사적 제 371호)
② 석릉
③ 가릉(사적 제 370호)
본문내용
① 곤릉 (사적 제 371호)
이 능은 가릉, 홍롱, 석릉과 함께 강화의 4대 고려왕릉으로 손꼽히는 곤릉이다. 곤릉이라는 이름이 곤(坤)이니 왕비나 왕대비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무덤의 주인은 고려 23대 왕인 고종의 어머니인 원덕태후다. 원덕태후는 1212년에 고려 22대 왕인 강종의 비(妃)로 책봉되어 연덕궁주(延德宮主)라 불렸는데, 훗날 고종이 원덕태후로 추대하였다. 무신정권 아래에서 왕이 폐위되거나 죽는 등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왕비가 된 원덕태후는 남편인 강종이 즉위한 지 2년여 만에 폐위되는 악운을 겪게 되었다. 비록 여인의 몸이었으나 권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던 원덕태후는 아들인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당시 실권자인 최우의 비위를 맞추며 살았다고 한다. 최우의 부인 정씨가 죽으니 원덕태후가 사치스러운 제사를 올려 물가가 뛸 정도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보내며 끝까지 아들을 보호하려 노력했던 원덕태후의 능은 기록이 잘못되어 고종의 비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원덕태후는 1239년에 사망하였는데,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항쟁하기 위해서 강화로 천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도굴되고, 봉분과 석조물이 훼손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에 정비하면서 능 앞에 3단의 장대석단을 석단을 마련하였고 봉분외곽을 석축으로 돌려 쌓아 단장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봉분 앞에는 ‘고려원덕왕후곤릉’이라 쓴 표석과 문인석이 있다. 근친혼이 많아 유달리 복잡한 고려시대의 족보를 살펴보면 원덕태후에 얽힌 인맥 역시 왕족이기 때문에 강종도 근친혼을 피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원덕태후와 강종 사이는 12촌이었는데, 원덕태후의 아버지가 현종의 5세손이었고, 어머니가 창락궁주로 불렸던 인종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였던 창락궁주는 강종의 아버지인 명종과 남매 사이였기 때문에 강종에게는 고모인 동시에 장모가 되는 관계였다. 원덕태후는 이렇게 얽히고설킨 고려시대 왕가의 족보 속에서 권력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