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당사건
- 최초 등록일
- 2015.04.01
- 최종 저작일
-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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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조봉암
Ⅲ. 진보당 사건
1. 발단
2. 전개과정
3.평화통일론
4. 결과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2011년 이슈화 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진보당 사건이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던 조봉암이 2011년 1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조봉암은 왜 그 당시에 간첩으로 몰렸던 것일까?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미친 진보당 사건을 알아보아야한다. 우리는 이번 발표에서 조봉암과 진보당사건에 대해 알아보고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조봉암
조봉암은 1899년 음력 9월 25일 경기도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20살이 되던 1919년 그는 고향 강화에서 유봉진 지사가 이끄는 만세운동에 가담하고 그 선봉에 섰다. 이로 인해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수감되었다. 그는 형무소 내에서도 투쟁을 계속하여 만세사건의 주동적 역할을 하곤 했다. 이 때 조봉암은 항일 독립투사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 후 민족통일전선체 형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지만 1932년 11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7년 동안 감옥에 유폐됨으로써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1947년 2월 2일 좌우합작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통일전선 재편성운동과 조봉암이 추진하고 있는 건민회를 중심으로 제 3전선 결성운동이 결정되고, 가칭 ‘조선민주주의독립전선’결성을 준비한다. 1948년 그의 나이 50세에 5.10총선거에 참가,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에 선임되고 8월에는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사소한 행정 절차상의 실수를 공금 유용으로 몰아 취임 반 년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 5월 30일 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다음 달 장택상과 함께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개원 7일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정당 조직 작업이 물거품되었다.
1956년 1월 26일 진보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31일 추진위원회 대표가 된다. 그는 3대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 하였으나 2위로 낙선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60세이던 1958년 1월 12일 그는 진보당 사건으로 체포되고, 항소와 상고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에서 재심청구를 기각하여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한다.
참고 자료
김상웅,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13.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역사비평사 , 2000.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후마니타스 ,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