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의형성과 갑신정변
- 최초 등록일
- 2014.12.30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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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개화파의 형성
2. 개화파의 분화
2-1. 급진개화파의 사상
2-2. 온건개화파의 사상
3. 갑신정변
3-1. 갑신정변의 배경
1) 구미 열강과의 외교
2) 차관 교섭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
3-2. 갑신정변의 전개
1) 정변의 목표
2) 정변의 준비
(1) 정변의 무력
(2) 정변단행의 결정
3) 개화 정권의 수립
(1)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4) 정변의 실패
5) 정변 실패의 요인
3-3.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1) <한성조약>의 체결
2) <천진조약>의 체결
3) 갑신정변의 의의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19c 중엽 서양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조선은 더 이상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에 안주할 수 없게 되었고 서구 열강을 비롯한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해야 했으며 열강들에게 본격적으로 문호를 개방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국제 환경의 변화는 조선 사회에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대응론 중의 하나가 바로 개화사상이었다. 그리고 이 개화사상은 오경석(吳慶錫), 박규수(朴珪壽), 유홍기(劉鴻基)등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개화사상의 3비조(鼻祖)라고 불리는 이들은 개화사상을 실천하여 나라를 개혁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해 낼 혁신적인 세력을 형성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교육받았던 청년들이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정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Ⅱ. 본론
1. 개화파의 형성
개화파의 3비조 중에 한 사람이었던 오경석은 개화파의 동지를 북촌의 양반자제 중에서 구하여 혁신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화파의 비조 중 오경석과 유홍기는 중인신분이었으므로 당시 북촌의 영민한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교육시킬 수 있는 사회신분이 아니었다. 따라서 오경석과 유홍기, 박규수 중 양반자제들을 교육시킬 수 있는 사람은 양반신분이었던 박규수뿐이었고 박규수는 북촌의 양반자제들을 선발하여 개화사상을 교육시켰다. 박규수의 가르침을 받아 개화사상을 형성한 대표적 인물로는 김옥균(金玉均), 홍영식(洪英植), 박영교(朴泳敎),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유길준(俞吉濬), 김홍집(金弘集) 등이 있다. 이들은 오경석과 유홍기가 중인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교육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박규수로 인해 개화사상이 형성되어 사회신분제의 부당성을 깨닫고 신분 장벽을 극복할 수 있게 되자, 오경석과 유홍기로부터 때때로 개화사상을 배우기도 했다.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탐구당, 2003
신용하, 『한국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의 지성사』, 지식산업사, 2010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 역사비평사, 2005
“갑신정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