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와의 항쟁과 삼별초
- 최초 등록일
- 2014.12.30
- 최종 저작일
- 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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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몽고의 침입
1) 몽고의 1차 침입
2) 몽고의 2차 침입
3) 몽고의 3차 침입
4) 몽고의 4~6차 침입
2. 삼 별 초
1) 삼별초의 설치와 역할
2) 삼별초의 몽고 항쟁
Ⅲ. 결 론
Ⅳ.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Ⅰ. 서 론
1206년 징기스칸(成吉思汗)의 등장에 의한 몽골(蒙古)제국의 성립은 13세기 동아시아 정세의 구도를 바꾸는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다. 몽골의 고려침입에 의하여 야기된 전쟁은 1231년부터 1273년까지 40여년을 지속했던 전쟁이다. 몽골은 12세기 초 이래,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했던 금(金)을 멸망시킨 후 남송에 대한 압력에 일환으로 고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몽골의 침입 당시 고려는 1170년 이후 무인정권의 정치체제가 장기간 구축되어 있었는데 최씨 무인정권은 기존의 금에 대한 사대정책과는 달리 몽골에 대한 항전책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항전책의 일환으로 1231년 개경에 가까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이로 인하여 고려와 몽골과의 전쟁은 금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1259년까지 장기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몽골군은 대소(大小) 11회에 걸쳐 고려를 침입(侵入)하였다.
Ⅱ. 본 론
1. 몽고의 침입
1) 몽고의 1차 침입
1221년 8월 고려에 들어온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는 황제의 편지와 함께 수달피 1만장, 가는 명주 3천 필, 가는 모시 2천 필, 솜 1만 근, 용단묵 1천장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물을 요구 했다. 그 후 몽고에서 사신 저가와 희속불화 등을 연이어 파견해 고려를 압박하자 최이는 장차 몽고와의 군사적 충돌을 예감하고 의주, 화주, 철관 등지에 성을 쌓았으며, 1223년에는 은병 300여 개, 쌀 2천여 석을 풀어 개성의 나성을 수리했다. 1225년(고종 12) 몽고 사신 저고여가 또 다시 고려에 들어와 수많은 공물을 뜯어낸 다음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다가 피살당했다. 고려는 사신 일행이 동진의 포선만노나 금 장수 우가하의 부하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몽고는 그 사건이 고려의 소행이라고 일방적으로 단정하고 복수를 선언했다. 이와 같이 몽고의 고려 침입은 사신 저고여의 피살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몽고의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복의 야욕에 있었다.
참고 자료
박용운, 『고려시대사』, 일지사, 2008
박용운, 『고려시대사의 길잡이』, 일지사, 2007
이상각, 『열정과 자존의 오백년 고려사』, 들녘, 2010
윤용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일지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