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前漢)과 진(秦)의 비교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4.11.30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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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전한(前漢)의 정치·경제
1. 전한(前漢)의 정치
2. 전한(前漢)의 경제
Ⅲ. 전한(前漢)의 사회·문화
1. 전한(前漢)의 사회
2. 전한(前漢)의 문화
Ⅳ.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진나라의 법치주의와 대토목공사, 그리고 외국정벌은 일반농민의 불만을 가중시켰고, 이에 따라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어서 항우와 유방이 대립하였고, 유방이 승리한 이후 한(漢)을 세우고 신한(新漢)이 나타나기 전까지 약 200여 년간의 왕조를 유지하게 된다.
진나라가 왕조를 15년 유지한 것에 비하면 한나라의 200년 왕조는 매우 길게 느껴진다. 같은 통일왕조임에도 불구하고 두 왕조의 시대 유지기간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에 대해 한나라 초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파악해보고, 진나라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 지를 주제로 글을 전개해 나가보고자 한다.
Ⅱ. 전한의 정치·경제
ⅰ. 전한(前漢)의 정치
한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 고조 유방은 진나라의 체제를 답습하면서도 통일시대에 맞게 재편하는 작업에 나섰다. 유방이 제일 먼저 직면한 문제는 그의 추종자들, 즉 그를 따라 한왕조를 창업한 집단의 대다수가 신분이 낮은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진나라의 관료들보다 행정적인 능력이 현저히 떨어질 뿐만 아니라, 유방과의 군신관계가 확고하게 구축되지 않은 상태였다. 유방과 그의 신하들을 결합시키고 있던 것은 혈연관계나 지연관계를 넘어선 개인과 개인의 신뢰관계였으며, 전국시대부터 사회적 풍속으로 자리잡아가던 임협적 관계였다. 즉, 고조집단은 입협집단이었기에 입협관계에서 벗어난 상하적인 군사관계로의 전환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고조가 시행한 첫 업무는 이 집단에 대한 논공행상이었다. 항우 타도에 협력한 공신 7명은 왕으로 봉하고, 거병 이래의 공신들은 열후로 봉했다. 또한 열후에게는 1현을 단위로 한 봉읍이 지급되어 그곳에서 징수한 조세가 그들의 수입이 되었다. 이들 공신에 대한 처우는 한왕조 내에서의 공식적인 신분과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임협적인 결합관계를 통일제국 내에서의 황제와 신하와의 관계로 정산하는 것이기도 했다.
참고 자료
환관, 2002, 『염철론』, 소명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