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무장투쟁의 시작 배경 :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인해 의병 봉기가 가장 거세게 일어났던 지역인 전라남도를 향해 일제가 실시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달 간 전라남도 일대와 그 외곽 지역을 초토화시킨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인하여 103인의 의병 대장이 희생되는 등의 피해를 입자 더 이상 국내에서의 무장투쟁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새롭게 무장투쟁을 펼칠 곳이 필요해졌는데, 우리민족이 다수 분포하고 있고, 국내와의 연락망을 취하기 적합한 데다 일제의 통치권이 비교적 약하게 미쳤던 한?만 국경지대에 여러 독립단체가 터를 잡고 성장하게 되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은 때를 기다리며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르면서, 무장단체를 결성해 일본군과는 소규모 국지전 위주의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가들에게 민중의 독립 열망을 실감케 해준 사건이었는데, 만주에서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여러 독립단체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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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 군정서의 본부는 백초구에서 동북방 135리, 대왕구에서 90리 떨어진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인 양봉산이라 불리어지는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고도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적합한 천혜의 요새였으며, 동쪽으로는 약 100리에 훈춘이, 동북방 100리에는 나자구,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연해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로 군정서군의 성장 : 북로 군정서군의 사령관이었던 김좌진 장군은 무엇보다 병력 증강에 힘썼는데, 특히 군정서 관할 구역 내의 주민들에게 징병제를 실시하여 병역의 의무를 지게 하였다. 평균 30호를 1구(區)로 하여 18~35세의 신체 건강한 청년을 15명 내지 25명 선발하여 독립군에 편성하였는데, 독립군 부대는 소대?중대?대대?연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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