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왕조인 전주이씨의 관향, 전주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2. 태조 이성계의 조상
3. 조선왕조의 관향, 전주
1) 경기전
2) 전주사고
Ⅲ. 맺음말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전주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전주는 견훤 후백제의 도읍이었고, 조선 건국조, 태조 이성계의의 본향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주에는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만큼 경기전, 조경단, 오목대 등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고, 지금까지도 전통도시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전주를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그리고 고려의 호족이자, 신흥 무인 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성계의 실제 고향이 전주가 아닌 점에 비롯한 태조의 조상과 조선 건국 이후 ‘전주 이씨’의 본향이라는 점에서 조선이 어떻게 전주의 위상을 높였는지 많은 유적들과 관련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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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개국공’ 이 구절 중 ‘전무공등주’나 ‘전주자사’란 구절은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지로 미리 점찍었음을 알 수 있는 구절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견훤의 출생지는 전주가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견훤이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한 이유에 주목하게 한다.
답은 전주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위상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전주는 호남지역 내에서 비교적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는 전주가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교통·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를 이용해 견훤은 전주를 중심으로 후백제의 영토를 확장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견훤이 전주를 택한 지리적 위치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전주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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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태조의 어진을 모신 태조진전은 영흥·전주·평양·개성·경주의 5개 지역에 건립되었다. 태조가 살아있을 때 영흥과 평양, 경주에 태조진전이 건립되었고, 태조가 사망한 후에 전주와 개성에 태조진전이 건립되었다.
태조진전이 건립된 지역들은, 영흥은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고, 전주는 이성계의 선조가 살았던 곳이다. 개성과 경주, 평양은 전 왕조의 수도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이곳 태조진전이 건립된 영전의 이름은 후에 각각 영흥부-선원전, 개성부-목청전, 평양부-영숭전, 경주부-집경전, 전주-경기전로 이름을 고쳤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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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역사박물관, 『기록물로 보는 全州』, 전주역사박물관,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