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의 북학의
- 최초 등록일
- 2014.11.16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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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박제가의 생애
2. 북학의 주요내용
3. 경세개혁안
4. 북학파의 사상적 특징
본문내용
1. 박제가의 생애
박제가는 영조 26년(1750) 승지 박평(朴坪)의 서자로 태어났다. 자를 차수(次修) 호를 초정(楚亭)이라 하였다. 11세에 아버지를 잃은 뒤 거처를 자주 옮겨 다니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또한 신분적 제한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는 18세 무렵에 연암 박지원, 아점 이덕무, 영재 유득공, 강산 이서구 등 북학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실학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박지원과는 사제관계를 맺고 그의 이용후생의 학풍을 이어받았으며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는「건연집」이라는 시가시집을 간행하여 국내외에 문명을 떨쳤다.
정조 2년(1778) 그는 이덕무와 함께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연경(燕京)을 다녀왔는데 당시 청나라는 고종의 건륭기(乾隆期, 1736-1796)로서 문화의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사고전서」등의 편찬을 위해 선발되었던 학자들이 북경에 운집해 있었다. 또한 문화의 발달로 인하여 온갖 물자가 풍부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그는 많은 선진문물과 서적을 접할 수 있었으며, 당시에「사고전서」편찬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기균을 위시하여 반정균, 이조원 등의 청나라를 대표하는 많은 석학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청에서 돌아온 그는 당시에 보고들은 내용 가운데 조선에서 행해지면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모아서「북학의」내․외편을 저술하였는데, 내편에서는 생활도구의 개선을,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과 개혁방안을 다루었다. 이는 그의 체험과 지식을 통하여 제시된 구빈(救貧)의 방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무렵 정조(정조 3년)가 임진·병자의 양란 이후 중세적 신분질서 내 서얼층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자 1777년 3월 서얼허통절목(庶孼許通節目)을 공포하고, 1779년 3월 규장각에 검서관직(檢書官職)을 설치해 서얼 출신들이 하급관리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때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 학자들과 더불어 초대 검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박제가는 약 13년간을 검서관으로 재직하면서 임금이 지은 글과「일성록」등을 정리하고「규장운전」,「무예도보통지」,「국조병감」,「사기영선」등의 서적 등을 편찬하였다.
참고 자료
박제가 저, 이익성 역, 『북학의』, 을유문화사, 2011
고진숙 글, 김창희 그림, 『홍대용』, 아이세움, 2008
한국철학사연구회 지음,『한국 실학 사상사』, 다운샘, 2002
조현규 지음,『한국의 윤리사상』중문, 2001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강좌 한국철학』, 예문서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