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외교적 승리 거란의 침입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11
- 1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000원
목차
Ⅰ. 머리말
Ⅱ. 국내외 정세
1. 대외 상황
2. 대내 상황
Ⅲ. 거란 1차 침입
1. 침입 과정
2. 담판 내용
Ⅳ. 서희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한국의 역사를 돌아보자면 외적의 침입이 없던 적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침입을 말하자면 고려시대의 거란의 침입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일 것이다. 이 중에서 고려시대의 거란의 침입은 총 3차례나 침입을 받게 되는데, 고려는 이 3차례의 침입으로 막대한 손실을 겪게 되었고 이후의 역사의 판도는 뒤바뀌게 된다. 이것은 고려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거란과 또한 중국 본토에 있었던 송나라까지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거란의 침입의 시초가 되는 1차 침입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서희의 외교담판인데 전쟁에서 그것도 불리한 조건에서의 전쟁에 외교로서 승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의 역사를 보아도 휴전이나 정전을 맺을 수 있어도 승리한 국가는 고려 밖에 없을 것이다.
외교적 승리 중심에는 서희가 있었다. 서희의 어떠한 언변으로 외교담판을 했는지가 의문이다. 주로 우리는 외교담판의 과정을 자세히 알기 보다는 그 결과만 알고 있고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의 대화로 끝이 났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것보다도 더 자세히 그 과정과 이 담판의 중심에 있는 서희라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 그 모습을 보고자 한다.
Ⅱ. 국내외 정세
1) 대외 상황
당시의 대외 상황을 먼저 살펴보자면 중국에는 여러 나라가 일어났다 스러지는 혼란기를 거쳐 후진(後晉)이 들어서게 된다. 이 후진이 들어서게 되는 배경은 본래 석경당은 후당(後唐)의 명종(明宗)을 섬겨 전공을 세우고, 그 딸을 아내로 맞았다. 금군장관(禁軍長官)으로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와 북경유수(北京留守)를 겸하여, 후당 최고의 세력가가 되었다. 그 후 명종의 후계자와 반목이 생기자 자립을 꾀하였으며, 거란[契丹]에 대하여 신하를 자청하고 세공(歲貢)을 바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운(燕雲) 16개주(州)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참고 자료
『고려사』 제3권 세가 제3 성종
『고려사절요』 권지이
『고려사』권 제94 열전 제7 서희
최규성, 박성봉,「서희의 북방정책」, 『고구려연구회 학술총서』 제2집, 고구려발해학회, 1999.12
박상현, 「전략적 사고의 관점에서 본 서희의 강동6주 협상」,『한국정치학회보』제44집 제3호, 한국정치학회 2010.9
박현모,「서희의 협상리더십연구」,『국제정치논총』제49집 2호, 한국국제정치학회, 200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