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견훤의 해양세력 형성
Ⅲ. 당대의 해양세력
1) 서남해 해양세력
2) 남해 해양세력
Ⅳ. 견훤과 해양 세력과의 관계
Ⅴ. 맺는 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후백제가 건국 된지 9년이 되는 해인 909년 덕진포(現 영암지역)에서 견훤을 필두로 한 후백제 세력과 왕건을 주축으로 한 태봉의 전함들이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결과는 견훤의 처절한 패배였다. 이 싸움의 결과는 견훤의 수군의 패배와 동시에 왕건과 견훤 두 해양세력의 판도를 결정지었다. 본래 군인 출신이라는 나름의 강점을 지니고 있고, 선대에 장보고의 활동이 두드러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견훤이었지만 왕건의 무차별 적인 화공을 받아 패배했다. 우리가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이야기 할 때 해양세력과의 연관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후백제의 견훤의 해양세력은 단지 덕진포에서 왕건의 적이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되어왔다. 그렇다면 견훤의 해양세력은 없었던 것일까?
<중 략>
서남해 해양세력으로 대표되는 후삼국 인물로는 장보고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후삼국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한 인물이 압해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능창이라고 하는 인물이다. 능창에 관하여서는 견훤의 해양세력이라는 일부 견해가 있지만, 여러 사료들을 살펴봐도 견훤의 수군이라는 부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능창이 많은 해양세력을 기반으로 한 대표적인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능창의 해양세력이 형성되게 되었을까. 그것은 통일 신라시기 대표적 해양세력인 장보고와 짙은 연관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능창과 장보고의 관계는 글에서도 밝힌바 있다. 그리고 후삼국 이전 청해진이 거느리고 있는 지역의 범위는 청해진 한 곳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인근 서남해 지역과 인근해안도 함께 다스렸는데, 그 중 하나의 세력이 능창이었다. 능창의 세력이 당시부터 후삼국까지 지속적으로 존재했다기 보다는 그 이전 압해도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는 말이 오히려 더 타당할 것이다.
<중 략>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본래 장보고를 주축으로 한 해양세력이었던 서남해 해양세력과 남해 해양세력이 갈라지게 되었는지에 관해 생각해보고, 견훤과 해양세력과의 연관성의 관한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우리는 서남해의 해양세력과 남해 해양세력이 서로 다르게 성장한 이유에 관해 생각해 보자면 본디 원래 이 두세력은 청해진이라는 구심점이라는 생기면서 세력이 통합된 해양세력의 모습을 보이지만, 청해진 몰락이후에는 각기 다른 세력의 호족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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