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 국내외적 영향에 대한 분석
- 최초 등록일
- 2014.05.07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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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아관파천의 배경
2. 아관파천의 결과와 의의
3. 아관파천의 영향
Ⅲ. 결 론 : 아관파천을 통해 본 당시 한국외교사의 특징
본문내용
Ⅰ. 서 론
조선의 국모였던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으로 인하여 조선에 대한 주도권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 세력에 대한 반발을 위해 나타난 것이 바로 ‘아관파천’이다. 아관파천은 당시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이 주한러시아공사 스페이어와 웨베르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사건으로 ‘춘생문 사건’에서부터 그 사건의 서막이 시작되게 된다. 이 사건은 어찌 보면 조선 국왕의 무능·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된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당시 조선을 둘러싼 러?일간의 각축을 나타내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러시아가 조선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고,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뿐만 아니라 열강의 경제적 침략은 이전보다 더욱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이러한 국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대러 정책의 변환, 집권 세력의 변화를 일으키는 등 국내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에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이 당시 국내?외적으로 끼친 영향을 토대로 그 당시 한국외교사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연구는 먼저 아관파천이 일어날 당시에 배경에 대해서 살펴본 후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과 전개과정, 국내·외적 영향을 통해 그 당시 외교의 특징을 고찰해보는 순으로 진행될 것이다.
Ⅱ. 본 론
1. 아관파천의 배경
1.1 아관파천 당시의 국내적 상황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함으로써 일본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그에 반해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이러한 흐름에 자극되어 조선에서는 배일 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고 그동안 친일세력에 눌려 있던 민비의 척족세력과 함께 구미공관과 밀접한 접촉을 가지며 친미·친러적 경향을 보이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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